5.26.2010

명상이란(두번째)

천하를 소유하더라도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마음은 늘 허전하게 돼 있습니다. 애인이 없어서 허전한 것이 아닙니다. 허전함은 참된 나가 자신을 알아달라고 하는 목소리입니다. 참된 자기는 공간 너머의 자리에 존재하는 그 어떤 영묘한 영성입니다. 우리가 마음 너머의 자리에 있는 신령스런 존재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주역에서 그것을 영구靈龜, ‘신령스러운 거북’이라고 합니다. 주역의 괘 중에 “자기 안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구하지 않고 왜 밖에서 그것을 찾는가?” 하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자기 안의 본성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 안의 생각 너머의 마음, 그것이 본래의 마음인데, 그 마음은 일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집합 같은 것입니다. 생각 너머의 자리에 있는 영묘한 영구靈龜라는 것은 만물과의 교집합 같은 것입니다. 하나로 모이는 자리,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개체가 아닙니다. 만물이 하나로 모이는 그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입니다. 그 자리를 가장 소중하게 모시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이라고 받듭니다. 고대 한국에서는 그 자리를 터득, 체현한 사람을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하느님으로 받들었습니다. 그런 전통이 우리나라에는 있었는데 없어졌고, 인도에서는 아직도 스승을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런 전통을 받아서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그 자리가 하나니까 아무런 분별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거기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거기서 나왔을 때, 생각을 들 때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여기까지가 해피타오가 정의한 명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과 삶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중요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몸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마음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깨어 있는 마음이고, 하나는 최면에 걸려 있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최면요법이 유행하고 있는데, 최면요법의 진정한 목적은 최면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고통은 내가 최면되어 있음에 있습니다. 육체에서 일어난 상처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수 있는데, 정신적인 상처는 최면에서 일어납니다. 또한 상처받은 것이 또 다른 최면을 일으킵니다.
생각 너머의 세계로 가라는 말은 현재의 생각을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모든 생각은 최면된 상태로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최면되기 쉬운 생각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이고, 둘째는 ‘내가 고통을 당하는 원인은 너에게 있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할 최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은 나를 사랑의 공간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또 ‘내가 고통을 당하는 원인은 너에게 있어’라는 생각은 나를 영원히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스스로 감금시키는 꼴이기 때문에 내 안의 근원적인 생명의 힘이 깨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하다는 생각을 영구히 지속시키게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생각에서 자유로워져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면서 ‘너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 하는 피해의식의 근거, 이유를 들어보면 매우 많습니다. ‘부모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하는 식. 그럴 때 보면 부모에게 서운한 것, 상처받은 것만 있고 부모로부터 받은 것은 없습니다. 완전히 왜곡된 인식입니다. 무임승차해서 공짜로 젖 먹고 양육되고 보호받아왔던 것은 인식 상에서 없고, 부모가 안 해준 것만 계산합니다.
심리학은 왜곡된 인식을 정당화하거나 진정한 자기가 깨어나는 것을 유보하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되고, 내 안의 긍정적인 힘을 북돋아줄 수 있는 쪽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면은 신경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최면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왜곡된 인식,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된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최면구조와 연결돼 있는 것이 상처입니다. 현대 심리학은 보통 상처로 인해 내가 왜곡된 구조를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피해의식이라는 또다른 병, 또다른 왜곡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최면을 통해서는 완전한 치유를 볼 수 없습니다. 그 상처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정의를 해봅시다. 상처는 에너지가 위축, 왜곡된 현상입니다. 상처라는 것은 사실 없습니다. 에너지가 왜곡되어 흐르다보니까 상처가 생기고, 인식이 왜곡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피해의식이나 내가 옳다는 강력한 도그마가 생겨나게 됩니다.
나는 최면상태의 마음의 구조를 세 가지로 봅니다. 인식의 왜곡, 에너지의 굴곡 현상 즉 에너지의 위축이 일어나는 현상과, 비효율적 행동이 그것입니다. 내 생명 에너지가 충분히 발현되고 있을 때는 상처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일어나는 인식이 온전한 인식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기 싫습니다. 이 세상에 잘못되고 잘된 것의 구분은 사실 없습니다. 단지 조금 비효율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비난하려는 의도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자신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여러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행동입니다. 여러분들이 했던 선택은 여러분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구조로 인해 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식구조가 왜곡돼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줄 때 그것을 간섭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상처로 받아들인다거나, 나를 도와주려는 것인데 의심을 해서 잘못된 판단,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조조가 자신을 위해 돼지를 잡으려고 칼을 가는 소리를 듣고, 도망 다니는 자의 불안한 심리상태로 인해 인식이 왜곡되어 자신을 죽이려는 것으로 착각하고 충신을 죽이고 맙니다.
이 세 가지 구조가 최면상태의 마음구조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세 가지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원래 자리의 깨어 있는 마음, 최면되어 있는 마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마음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마음상태에 있다가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그릇된 마음으로 가고, 깨어 있는 마음과 최면되어 있는 마음 사이를 왔다갔다합니다.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도 마음의 북극성이 깨어 있는 마음 쪽으로 가려는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의 북극성이 영적인 본성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 학문을 최고의 학문으로 치는데, 공자는 이것을 큰 배움, 대학大學이라고 했습니다. 대학大學의 도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입니다. 즉, 이미 밝아 있는 덕을 다시 밝힌다는 뜻입니다. 밝은 덕은 생각 너머에 있는 마음자리에 우리 안의 고대적 자아로 있습니다. 고대적 자아는 우리 안에 있었는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의 신화입니다. 고대적인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들이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다가 갔다가 다시 태어나고 또다시 가고 이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대학지도大學之道는 근본적인 윤회의 자리를 끊고 이 자리를 되찾아 승천昇天, 리어센드reascend하기 위한 공부입니다. 해피타오도 역시 그렇습니다. 근원적으로는 그렇고, 여기에서 다시 현실 속에서 완전히 온유한 마음으로, 현실을 완전하게 살고, 보다 창조적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빛나게 밝혀라, 이것이 재명명덕在明明德입니다. 그때 우리 삶이 진화하고 지구가 새로운 영적인 권역으로 들어간다는 메시지가 해피타오입니다. <3천년의 약속>을 보면, 3천년 동안을 지금 50년 동안 준비한다고 그랬잖습니까? 만년 이만년 뒤에는 지구가 완전히 통일됩니다―다른 문명권으로. 여러분들이 거기에 다시 태어나서 뭔가를 하기 위해서 여기에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깨어서 더욱 튼실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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