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2010

마음공부의 본질

일상적인 삶 속에서 명상은 어떠해야 합니까?

삶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삶을 떠나서 명상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명상이 단지 나 혼자만의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풍요로움과 성장을 위한 것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삶 속에서 그대의 명상이 펄펄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좀더 깨어서 살펴보십시오. 자신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생각을 지어내는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보십시오. 그것이 삶 속의 명상입니다.

삶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마음, 즉 생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관점만 주장하려는 고집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판단하고서 피해의식에 빠지거나 불편해하는 것들은 이와 같은 자기중심성과 독단적 견해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고 과정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것을 놓아버리는 과정, 이것이 마음공부입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깊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줍니다. 그대가 찾는 편안함은 여기에서 마음껏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음공부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해방과 사랑, 그리고 평화가 넘실거리는 삶이 결론입니다. 친절과 자비로움과 감사 속에서 사는 것이 결론입니다. 마음공부란 마음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삶을 위한 공부입니다. 절간이나 산속에 앉아서 마음 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펄펄 살아 움직이기 위한 공부가 마음공부입니다. 마음공부는 마음의 주체를 바로 세우는 공부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주체로서 우리 모두가 함께 더불어 잘 사는 길을 나누고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단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을 공부하는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철저하게 탐구함으로써, 그대 안에서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둘이 아님을 오롯이 깨닫고, 팔만 사천 가지 번뇌를 일거에 뿌리 뽑는 혁명입니다. 하나가 된 그곳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바람처럼 자유롭게, 바다처럼 싱싱하게, 나무처럼 자비롭게 움직이는 삶이 드러나게 됩니다.

마음의 주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의 미혹과 환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나 감정이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이 가리키는 대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서 ‘지금 있는 그대로’로 돌이켜야 합니다. 깨어서 현재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생각을 잡는 길이며, 생각을 잡아야 생각이 그려내는 미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상이나 개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진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공부의 첫걸음입니다.

마음공부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또는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입니까?

마음공부는 생각과 판단으로서의 마음이 자신이 아님을 알고, 그것의 주인이 되는 공부입니다. 주인이 되려면 우선 마음이 어떻게 생긴 것이지 알아야겠지요. 이것이 ‘생각 놓는 공부’입니다. 알면 놓을 수 있습니다. 놓으면 자유로워집니다. 그 다음은 ‘참나에 대한 탐구’입니다. 상대성을 넘어선 참나에 대한 탐구는 곧 가슴을 여는 공부이며, 본질적인 마음을 아는 공부입니다. 그 다음은 참마음을 쓰는 공부입니다. 이것은 곧 삶을 통해서 배우는 공부입니다. 모든 생각은 상대적으로 움직입니다. 너와 나, 편함과 불편함, 기분 좋음과 기분 나쁨, 싫고 좋음 등으로 나뉩니다. ‘나’가 있으면 ‘너’가 생기고, 대립과 분열이 생겨납니다. 싫은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이 생기고, 그것이 주인이 되어서 끌려 다니게 됩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에고는 싫고 좋음을 통해서 자신을 강화합니다. 이 싫고 좋음이 실상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생각에 지나지 않는데 우리는 그것에 반응을 하기 때문에 끄달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은 끊임없이 딴 데로 가 버립니다. 그 결과 진정한 ‘지금 여기의 삶’의 신성한 빛이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싫음과 좋음이 일어날 때 그것이 무상한 것임을 보고 끄달리지 않고, ‘지금 여기’로 돌아와 묵묵히 자신이 길을 갈 수 있는 마음을 터득하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현실상황에서 싫음과 좋음에 관계없이 전체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헌신과 자유를 동시에 터득할 때, 그때 마음공부의 열매가 익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렇지, 들어가 보면 온갖 번뇌가 들끓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보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우울과 좌절, 무기력과 분노와 같은 인간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마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에고가 있는 한…. 현 지구문명권에서 이것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에고의 마음은 가만히 있어도 끊임없이 고苦를 생산해내는 ‘고 제조기’입니다. 이 고 제조기를 멈추지 않으면 표면적인 위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깊고 영원한 평화나 행복 속에 살 수 없습니다. 자각이 없는 한, 이 고 제조기는 끊임없이 자가 복제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깨어나지 않는 인간은 그 유리막 같은 마음 속에서 살면서 그런 줄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 바깥에 있다고 믿어버립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 안에 갇혀 생각하느라 제대로 산 적이 없고 타인과 객관적으로 만난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불화로 몰고 가며 은인을 원수로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과 감정으로서의 마음은 단지 기능에 불과합니다. 그 기능은 깨어 있지 못할 때 온갖 불행을 불러오는 미혹입니다. 깨어서 마음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불행을 불러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속에 있는 본래의 빛과 생명이 스스로 비추이면서 우리는 삶의 풍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탐욕과 이기심과 분노를 없앨 수 있을까요?

탐욕, 이기심, 분노, 두려움은 사실 실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늘상 우리가 여기에 끌려 다니는 것은 우리의 무지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빛의 부재일 뿐 실체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깨어 있음의 빛’의 사라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공부의 시작은 무조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로 가는 유일한 문입니다. 모든 고통과 미혹은 한 생각으로 일어납니다. 모든 행복도 한 생각으로 일어납니다. 한 생각 속에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죽어서 다른 몸을 받고 태어나는 것만이 윤회가 아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 그 속에 빠질 때 그것이 윤회입니다. 한 생각 일어날 때 바로 깨어서 알아차리면 그 생각은 사라집니다. 그 순간 윤회는 없습니다. 계속 하다보면 잡생각은 사라지고 마음이 맑고 고요해집니다. 그때 계속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빠지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면서 흘려보내면 그 생각은 또 사라집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조용해집니다. 그러다 마음이 뚝 끊어지는 자리가 나오는데,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면서 처음으로 그대는 생각 밖의 자유롭고 밝은 세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처럼 넓은 그 공간은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이자 모든 사물의 본성입니다.

자각이 무엇입니까?

자각이란 컴퓨터 화면 속의 이야기로 들어갔던 그대의 마음이 갑자기 컴퓨터 바깥으로 나와, 그것을 하고 있는 그대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자각은 그대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대는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 너머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각이란 생각이 그려내는 그림에서 깨어나, 그것을 만들어낸 자신으로 돌이키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생각에서 지금으로 돌이켜 새롭고 신선한 눈으로 사실을 보는 힘입니다. 이로써 지혜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현재에서 이탈하여 과거나 미래로 치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망상입니다. 그 망상의 진행을 ‘아, 이게 사실이 아니라 생각일 뿐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자각입니다. 자각은 생각과 사실의 차이를 아는 힘입니다. 즉 생각이 그려내는 그림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현재의 사실로, 즉 그러고 있는 ‘나’로 돌이키는 것이 자각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우리는 이야기에 빠진 나머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지껄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수가 있습니다. 이때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 자각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음을, 솔직하게 그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각을 통해서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많은 생각의 혼란과 혼침이 사라집니다.

자각은 있는 그대로 정직하고 솔직한 앎 속에 생각 하나를 더 보태지 않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흔히 나오는 마음의 습관은, 불안이나 분노가 일어날 때 다른 생각을 해서 분노나 불안에서 도망갑니다. 그때 ‘불안과 분노가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앎, 이것이 자각 즉 깨어 있음입니다.

자신의 선입견이나 의견이나 바람 없이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알아차림으로써 우리는 편견에서 해방되고 순간순간의 삶을 새롭고 생동감 있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을 오해 없이 충만하게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적인 관찰을 외부에 적용할 때 우리는 성공과 행복을 불러오는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가 있습니다. 자각은 그대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넘어선 순수공간을 해방시킵니다. 과거나 미래의 생각으로 전혀 때 묻지 않은 그대 마음속의 순수공간의 발견, 이것이 명상입니다.

만트라 명상을 하면서 자각을 계발할 수 있을까요?

만트라 명상은 소리 속으로 빠져드는 수련법입니다. 만트라 명상을 통해서 생각의 진행을 끊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는 있지만 무기誣欺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지만 민감하고 생생하게 깨어 있는 자각은 결여하고 있습니다. 만트라 명상을 하면서 고요해질 때, 고요를 흩트리지 말고 명상을 하는 나로 돌이켜서 안팎을 동시에 느껴보세요. 그 느낌 속에 깨어 있음이 자리 잡도록 하세요. 그것이 바로 자각입니다.

자각이 없으면 혼돈과 착각과 어리석음의 구름이 자신의 마음을 덮어버림으로써 계속 불행 속에 윤회하게 됩니다. 윤회 즉 불행과 고통의 메커니즘을 끊어버리고 행복을 초대하기 위해서 자각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대가 결심을 한다면 이렇게 깨어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대의 내면에 자각의 등불을 켬으로써 모든 악이 사라지고 모든 선과 행복이 피어나게 하세요. 자각을 영원한 벗으로 삼으세요.

줄곧 단학과 선도에 심취해 있다가 마음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도와 마음공부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선도는 에너지, 기氣 같은 수많은 느낌을 바탕으로 공부하지요. 하지만 그것을 분리해서 느끼는 나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파동이 다르거나 탁한 환경을 만나면 마음이 시끄러워지지요. 마음공부의 단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 상황이 바뀌면 마음이 시끄러워질까요? 마음의 깨달음은 바로 그와 같은 에너지의 체험, 느낌을 놓아버리고 그것을 느끼는 나로 돌아와, 도대체 싫고 좋음의 세계가 어디서 나오는지 그 정체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를 바로 알고 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나를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얻는 것이 깨달음의 풍요입니다.

동양학에서 말하는 태극과 무극은 깨달음의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우주의 만물은 상대성, 즉 음양으로 나누어져 작용하고 있지요. 그것을 동북아에서는 태극太極이라고 합니다. 태극은 음양의 분별이 시작되는 곳이며, 음양은 대립하는 세계로서 서로가 자신을 주장하며 싸움이 끊어질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음양이 작용하기 이전의 본질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극無極입니다. 이 둘이 나누어지는 것은 바로 ‘나’로 해서입니다. 선도仙道는 작용세계, 즉 태극까지는 깨칠 수 있는데 무극의 세계는 알 수 없습니다. ‘나’가 멈춘 세계, 대립이 없어진 무극의 세계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무극은 무아이자 전체이며, 치우침이 없는 평등한 사랑과 평화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무극과 태극 사이는 티끌만한 차이지만 들어가면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큽니다.

선도나 요가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하는 느낌과 자신 사이에서 방황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즉 깨끗한 것과 탁한 것, 편안한 것과 편안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깨끗한 것과 편한 것을 누리는 데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 반대를 만났을 때 마음의 평화가 곧바로 깨어진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즉, 추구하는 그 깨끗함과 편함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에고의 맹목적인 집착이 삶과 불화를 일으킬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억하세요. 나 없음(에고 없음)이 문입니다. 그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입니다. 요가의 끝이 탄트라이듯, 선도의 끝이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이는 ‘나’라는 생각의 알갱이가 빠져버린 세계입니다. 내부가 텅 비었지만 그럼에도 순수생명으로 충만한 세계입니다. 나 없는 세계는 전부가 다 진리이며, 길이며,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호흡법을 통해서 그 무극, 무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물론 호흡은 마음을 지극히 맑혀줍니다. 생기가 충만하면 생각이 고요히 가라않습니다. 그러나 호흡법은 아직 호흡과 호흡에 집중하는 나가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분별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청명한 태극의 세계는 얻을 수 있지만 무극의 세계는 얻지 못합니다. 무극, 무아의 세계는 알음알이나 집중의 명상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알음알이와 집중은 마음이 둘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무극의 세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단지 호흡법이나 명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상을 통한 순수의식의 상태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의 본질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그리고 깊이 사유해야 합니다.

호흡과 명상을 하는 나가 무엇인지 깊이 물어 그 둘의 분별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자리가 벌어져 나왔을 때 무극의 깨달음이 열리게 됩니다. 이것이 근원적인 존재의 변화입니다. 즉, 그대의 자각하는 의식이 에고체에서 떨어져 법신法身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붓다가 말한 열반이 바로 이 무극의 세계와 가깝습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가야 합니까?

무아는 그대 자신의 궁극적인 진실입니다. 그 진실의 힘으로 둘이 없이 전적으로 움직여갈 때 존재 전체가 진실이 됩니다. 즉, 그대 자체가 길이 되는 것입니다. 무아를 얻고 난 후에 다시 파도치는 삶 속으로 들어와 작용과 비작용의 조화를 동시에 터득하게 되는데, 그것이 인간이 우주체로 화하여 완성되는 길입니다. 모든 차크라가 다 열리고, 모든 카르마가 다 떨어져나가서 더 이상 새어나가는 것이 없어질 때 궁극적 해탈이 오는데, 그것을 황극皇極이라고도 합니다. 무극을 깨달은 존재가 산에 남아 있지 않고 삶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곧 ‘삶을 깨달음화한다’는 뜻입니다.

삶을 대긍정하여 모든 곳 모든 자리에서 완전히 꽃피우고 누리는 황극의 세계는 새 시대의 진인眞人들이 세상에 진리를 펼치는 길입니다. 신성의 씨앗으로서 인간이 완전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삶을 포용하여 완성에 이르는 황극입니다. 이러한 황극의 길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마음공부의 끝이 무극의 깨달음이라면 삶의 공부가 황극입니다. 삶 속에서 조화와 창조를 아우르는 공부입니다.

상대성의 마음을 넘어선 자리에서 다시 마음을 온전히 씀으로써 황극의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본성이 되어 그 본성을 100% 쓰고 표현함으로써 씨앗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즉, 아낌없이 주고 가는 것입니다. 명상을 자비로, 돌봄으로, 나눔으로 꽃피워 내는 것이 황극의 몫입니다. 그것이 곧 중도中道이며,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새 문명 창조자들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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