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2011

해피타오 3월 메인세션 소감문

Hello,

My name is Jan and I’m from Belgium. I met my Korean wife,선화, while travelling in the Philippines in 1999. We got married in 2003 and we lived till September 2010 in Belgium. In 2007 our son Jun was born and in 2008 our daughter Sora was born. In September 2010 we moved to Seoul and we’re thinking of spending the rest of our life in Korea.

I’ve always had a very difficult relationship with my father. I see him as 90% rational thinking and 10% emotion. Principals like responsibility, respect, honesty, hard-working and loyalty were for him always much more important than love. My father could get very angry when things didn’t go the way he had planned it. I felt that he gave me no freedom to make my own decisions. It seemed to me that he planned my life and that I just followed him. I couldn’t feel any love for him, nor could I feel any love from him. Slowly I started closing me more and more for him and I only talked to him when necessary. But I did feel respect for him. I had a younger sister and my father always treated us equally, he was always honest and never had the intention to harm other people. But still I could feel no love for him…

I’m 41 years old now and when I look now at who I am, I don’t seem to differ so much from my father. In relationship with my wife and children it also seems that first some conditions like responsibility, respect and hard-working have to be fulfilled and then I could experience love. For me that was normal, because that was what I learned my whole life. There would always be anger, frustration and uncertainty in myself. I didn’t know how to ventilate this, so it stayed inside me and piled up, waiting to explode. I would then express my anger and frustration towards the people I love the most, my wife and children. And I felt so bad about this, because I didn’t want to hurt them, I wanted to love them. So I created a “bad I’, a bad image about myself. There were times that I felt depressed and that I didn’t want to see anybody. Since there were children I’ve lived with a lot of ups and downs. Every time I hurt the feelings of my children, deep inside myself I felt the pain and suffering from when I was a little boy. And I didn’t want my children to experience the same pain I always felt.

I’ve never really been into meditation and yoga. Probably I was a too much rational person. 선화 did some meditation in Thailand. She told me often that it also would be a good experience for me, but I didn’t think much about it. Two years ago I could see that something needed to be done, or otherwise our family could not survive this. I started consulting a psychologist and I felt better. I even briefly had a better relationship with my father, but after a while it went bad again. After moving to Korea I started consulting a psychiatrist, who used hypnosis techniques. He could make me go back to my childhood and experience the pain I then had. I felt better after that, but only for a short time. At that time 선화 started the meditation-yoga meetings with happytao. I could see that she felt very good there and she suggested me to go too. I went and I liked it. I liked the people and I felt relaxed there. But after a few visits I felt that these meetings could also not cure me and I felt unsure. 선화 did a meditation session in Kwangju and also recommended it to me. I hesitated but finally agreed.

I took the train from Seoul to Kwangju. The house I stayed in was basic compared to our apartment in Seoul, but the company was good : 한바다선생님, 지애님 and 포도 (a lovely dog). We spent there one week together. Our days were filled with meditation, yoga, some walking and tasting the delicious Kwangju food. I felt very comfortable there and I opened myself completely. Slowly I could connect to my inner being and later I was able to feel energy flowing from my forehead through my lungs to my stomach. I never thought I would be able to experience this. I could go deeper and deeper and deeper into myself. It felt amazingly good, but also a bit scary, because I didn’t know where it would end. The last couple of days 선화 came to visit me in Kwangju.

During the last meditation session we had a big confrontation. 선화 was looking in her life for unconditioned love. I expected her first to take responsibility and then I could give her love. It felt like a big rock in my stomach was blocking the river of love. I had a hard time then. I felt the pressure in my head getting too much and emotionally I broke down. I don’t remember everything what happened next. I stood up, shouted, ran to my room, slamming the door. I stood against the wall, crying and wanting to shout out loud, but I couldn’t produce any sound. My whole body was tense and I had problems breathing. 한바다선생님 and 지애님 were holding me and trying to calm me down. The pressure in my stomach became bigger and bigger until I seemed to explode. I could feel the rock of pain which I have carried since my childhood get out of my stomach. I calmed down and started to breath normal again. 한바다선생님 and 지애님 helped me to lay down on the floor. I can still see 한바다선생님sitting there and asking me “what do you feel now”? I said “the rock is gone and the river is flowing, filled with pure, unconditional love”. I know 한바다선생님 felt good then and I felt amazing. After all these years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experienced absolute freedom. 선화 came into the room and sat next to me. I started laughing like a happy child, full of joy.

That afternoon I went to the sauna and I washed the dirt from the past of my skin. I felt like reborn. Reborn in Kwangju. In the evening we had a kind of reunion. There was 한바다선생님, 지애님, 선화님, 예인님, 원무님, 원화님, 포도 and me. We held hands and chanted om shanti… I felt that these people had given me the biggest present anybody could ever give me, my freedom. Thank you!!!

The next morning my wife and I drove back to Seoul. I felt light and bright, but also unsure, because I didn’t know how I would react to the outside world. Back in Seoul it felt great to see our children again. That evening I called my father and I told him about my experiences during my meditation session in Kwangju. I told him that I felt ready to make a new start and my father felt happy. Maybe it was the first time in our life that we both felt this happy connection. I don’t know what the future will bring and I’m sure there will still come some difficult moments, but there is again hope for our family and I think we can make it.

Thank you happytao

3.30.2011

<지구 바라봐주기> 운동을 제안한다

INTERVIEW




소상 이상훈으로부터 듣다
지구 바라봐주기 운동을 제안한다

2011년 3월 21일 이른 저녁, 양재역 부근 커피숍에서 소상(笑象) 이상훈님을 만났다. 그는 우리들 사이에서 관법(灌法)과 화두선(話頭禪)에 상당히 정통한 이로 알려져 있으며 몇 차례에 걸쳐서 격월간 <해피타오>에 실린 회원칼럼을 통해 그 일단과 면모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번에 만남은 일본상황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있는 지구적 과제, 우리의 대응에 대한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그에 의하면 관법의 이해 실천편에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한다. 진지한 열정으로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던 그의 얘기들을 옮겨 적는다.



먼저 그가 요즘 지구가 겪고 있는 느낌은 어떨까? 의외로 대답은 간단하다.
전체적인 흐름이나 향방은 잘 모르겠고 다만 기운이 강해지고 있는 느낌은 있어요.
이어 바로 요즘 그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 사안으로 재빠르게 급선회, 해피타오 가족을 비롯한 다른 모든 분들에게 제안을 하고 싶단다.
요즘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들을 이용해서 뭘 좀 하려고 합니다. 해피타오 식구들도 같이 참여해서 이게 전 세계적으로 퍼뜨려졌으면 좋겠어요. 다들 예언을 해요. 예를 들어서 상원사에 계셨던 탄허 스님이라고, 1983이미 입적하신 분이지만 한국과 지구의 미래에 대해 여러 예언을 했어요. 북극해의 얼음이 녹으면서 지구인구의 60~70%가 죽는다거나, 지진과 원자핵 폭발에 의한 인류의 희생 등에 대해 예언을 했잖아요. 한바다님의 <3천년의 약속>에도 지구대변동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화성소년 보리스카도 그런 얘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고, 인류대재앙과 환란에 대한 기독교 성서에도 그런 얘기들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답답한 것은 온통 죽는다는 얘기는 있는데, 어떻게 하면 지구와 환란에 처한 인류를 구할 것인가 하는 얘기는 없어요. 지금 시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지구를 관(觀)해주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구와 하나가 되어 명상을 한다든가, 지구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 큰 애정으로 감싸주는 등 각자가 자기 나름의 수준과 방식에 따라 지구 봐주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는 것이 좋고, 소수가 동참하다가 점차 수백, 수천의 사람들, 나아가 전 세계인들이 그렇게 해나갈 때 나는 분명히 지구가 치유된다고 봅니다. 나는 관(觀)만이 업을 사그라뜨릴 수 있는 있는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격월간 <해피타오>에 그가 연재한 글에서 이미 관(觀)에 대한 그의 견해, 즉 관이란 무엇인가, 관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관을 통한 업식의 소멸원리 등이 설명돼 있다. 글에서 지구바라보기, 관(觀)을 통해 어떻게 지구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가에 대한 의아스러움에 답하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다소 길지만 옮겨본다.
관법觀法이란 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무런 기준이나 기대 없이, 즉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호흡, 자신의 몸과 동작, 자신의 생각과 감정, 더 나아가 자신의 육근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따라 움직이는 자신의 모든 의식을 의도 없이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에고 활동을 바라보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도 없이’ 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식으로 의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법 수행이 왜, 또 어떤 이유로 업을, 에고를 소멸하는 걸까요? 양자역학에서는 광자나 전자 같은 소립자는 입자로 혹은 파동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그것이 입자로 혹은 파동으로 존재할까요? 그것은 입자를 관찰하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른 것입니다. 즉, 이를 입자로서 보고자 하면 입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관찰하는 주체가 없다면, 즉 관찰한다는 의도가 없다면 이것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론이 아닐 수 없지요. 결국 소립자는 관찰자의 생각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입자가 입자이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입자는 관찰자의 생각의 반영입니다. 이를 불교적으로 환원하면 입자는 결국 업인 것입니다.
물론 업은 단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업이란 처음에 한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또 그러한 생각이 반복되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으며 그것에 대한 개인의 호ㆍ불호의 경향성으로 나타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끼리 서로 작용과 반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를 양자역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이 세상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면 소립자들은 그 생각대로 입자를 구성하며 그것이 화학적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대상들은 우리의 생각에 의해 가능성의 파동의 상태에서 고정된 입자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이를 심리 상태의 과정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을 내용인데도 자신에게는 과거의 기억, 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정한 경향성으로 인해 타인의 말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 화는 체내에서 어떠한 화학적 성격을 지닌 물질을 발생시켜 그것이 얼굴을 붉게 만들며 그 타인에게 화를 표출하고 이는 몸의 균형을 깨뜨려 그것이 지속이 되면 몸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의도 없이 바라보아 소멸시키는 것이 관입니다. 관은 의도 없이, 그리고 선택 없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미 고정화되어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는 육체 또는 마음의 상태를 다시 가능성만 존재하는 공空의 상태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인식할까요? 이 몸과 그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것이 ‘나’라고 인식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고정시키는 시각입니다. 결국 스스로를 입자화, 즉 물질화시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정 지어진 ‘나’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끌고 가는 주인의 삶이 아니라 생각에 끌려가는, 경향성에 끌려가는 노예의 삶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아무런 의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일, 즉 관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입자로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과 밖이 교류할 있는, 생명력이 넘쳐날 수 있는 자유로운 파동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업을 해소하는 길입니다. 관은 바로 업을 정화해 나가는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이며 새로운 창조를 위한 준비입니다.
여기서 ‘의도 없이’, ‘선택 없이’란 표현은 바로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으로 음도 양도(색) 아닌 중도(공)의 표현으로, 양자역학에서의 관찰자 없는 바라봄, 즉 의도 없는 마음입니다. 선가의 3조 승찬 선사는 <신심명>이라는 글의 첫머리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다만 간택을 꺼릴 따름이라. 미워하고 좋아하고 하는 마음만 버린다면 지극한 도는 명백하리니.”라고 말합니다. 분별심 없는 마음이 곧 진리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계속 하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란이 지구가 가지고 있는 업(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지구가 지금 소녀에서 성인여자로 바뀌어 가고 있는 과정에서 치루는 생리통이라 말하고 있는 사람, 혹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이다, 아니다 지구내부가 더워지고 있어서 그렇다 등등 여러 해석과 의견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맞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게 사실이다, 이게 팩트다, 지구인의 반이 죽는다, 90%가 죽는다, 뭐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는 겁니다. 어떤 분은 지금 여기에 100% 머물러 있으면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만, 나는 그 사람이 정말 마음공부 하는 사람인지 의아스럽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100% 존재하는 사람이 과연 지구상에 몇 명이나 될 것이며,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죽어가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할 지구 전체의 운명을 봤을 때,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공부의 목적, 마음공부의 목적과 목표를 상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데로 넘어가면 보살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 내가 쓴 글에도 그런 내용이 언급돼 있을 겁니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로 목숨을 걸고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려면 보살도가 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붓다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붓다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아요. 붓다가 되어 100% 있다, 그것은 붓다가 아닙니다.

그러면 지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한 개인의 업을 녹이기 위해서 관을 시키듯이, 지구라는 행성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우리가 같이 지구의 고통과 통증을 바라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녹는다 이겁니다. 관이라는 것을 전문적으로 해본 사람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건데요,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관하고 명상을 하면 됩니다. 지구를 떠올리며 애정으로 바라봐 줘도 될 거고, 지구를 느끼면서 진아(공)의 자리에서 무심으로 함께 하는 수도 있겠습니다. 동시에 지구를 느끼면서. 동시에 느끼면 내 육체적 아픔이 있겠지만, 항상 진아의 마음으로 육체와 지구를 하나로 연결시켜서 바라보자는 거죠. 다같이. 한바다님과 지난 주에 만나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순간에도 계속 일본을 관하며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일본이 안정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 이제 일본이 괜찮은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한바다님께서도 동참해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페이스북이나 이런 것을 통해 가지고 전 세계에 퍼뜨려보자는 거죠. 지구가 환란이 일어나는 것을 다 막지는 못할지라도 완화시켜 보자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많은 개체적 생명들을 살려낼 수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보살도(菩薩道) 중에서도 진리를 깨치게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보살도지만, 법화경에서도 나와 있듯이 일단 그 사람이 겪고 있는 현재의 고통을 덜어주면서 다음 스텝으로, 근본적인 인간고들, 즉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봐요. 지금 당장의 고통도 덜어주지 못하면서, 생로병사 문제도 도와주지 못 하면서 자기 혼자 지금 여기에 100%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나는 이해가 안 됩니다. 도가 낮아서 그런가 봐요. 지금 저는 이것을 하자고 계속 주변에 얘기하고 다니고 있어요. 내가 페이스북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동참을 촉구할 거예요. 많은 지구인들이 함께 할 거라 생각합니다.

(잠시 침묵) 마주 앉아 듣고만 있는데 그의 절실함과 진실한 마음에 감응되면서 따스한 감동이 일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지진이 터지기 전 날인가 갑자기 내면에서 ‘지구를 구원할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3일인가 4일인가 기도를 했는데, 응답이 페이스 북이에요. 왜 응답이 페이스북일까 의아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다 같이 관을 하자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바다님이 적극 나서 주시고, 스님들 화두선 하는 것 잠깐 멈추시고, 기독교인들 역시 기도로 동참해주시고, 모두들 지구 바라봐주기를 합시다 이거죠. 이게 개개인 차원에서는 대단치 않게 여겨질수도 있어요. 그러나 전체적인 차원에서는 상상이상으로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 많은 종교인들이 일본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설령 지금 지구의 몸살이 지구의 업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자연재해라 치더라도, 지구의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성장통이라 할지라도, 지구의 고통을 좀 덜어주자, 생리통이 일어나는 것을 좀 덜어주자, 좀 덜 아플 수 있도록 해주자, 그것을 통해서 또한 되도록 적은 희생에 그치도록 하자 그거에요. 이런 취지로 생각했던 건데 타이밍을 약간 놓친 감은 있어요. 일본이 안정화되면서 좀 게으르고 싶은 마음이 약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면, 그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기운을 많이 받는 것을 좋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좋은 기운으로 지구 바라보기를 해주자 이거죠. 우리가 사람을 치유할 때도 사실은 그 사람을 나와 하나로 느껴서(관해서) 녹여주는 거거든요. 그것이 힐링의 과정인데 지구 바라보기도 같은 맥락이거든요. 힐링 방법론에 관한 얘긴데 예전에 제가 관법에 대하여 처음 썼을 때 그런 내용이 있어요. 마음적으로 관이 무엇이냐 하는 사상적 이론의 이해부분이었다면, 오늘 제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것의 실천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내용의 발기문과 취지 등을 영문과 일본어로 준비하고 있어요. 일본이 안정화되었지만,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즉 또 다른 재해가 발생한다면 지속적으로 퍼져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해피타오 가족 여러분들도 가족들은 물론, 친구와 동창들에게 알리고 함께 하자고 말씀드립시다. 지구 바라보기 운동(가칭) 법화(法華) 형에게도 얘기했더니 동참하겠다, 친구들에게도 얘기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앞으로 흐름은 어떻게 될 것 같나요? 혹 잡혀지는 것들 있어요?
(고개를 흔들며)몰라요, 난 그런 거 몰라요. 그냥 지금 고통스러운 것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요.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이고 지구가 겪고 있는 고통을 느낄 뿐이에요. 지금 지구적으로 기운이 강해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느껴보면 지구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 고통, 괴로움도 파워일 수 있는 거예요. 지구 내부에서 끓고 있으니까 힘이 솟고 있는 것 같지만, 지구 전체적으로 괴롭다고요. 앞에서 괴로우면 괴롭잖아요. 이게 정상적인 거죠. 지금 여기가 괴롭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 괴로움을 없애야지, 그렇잖아요? 지금 배고프다는데 라면이라도 끓여줘야지, 내일 뷔페 약속을 하면 뭐해? 나는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고, 그런 능력도 안 되지만,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런 시기에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자는 말이 선적으로 맞을 수는 있습니다(그것은 차원에 따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겠지만, 공부도 모르고 윤회를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하게 되는데, 핵폭발에 의해서 지구 인류가 60~70% 정도가 죽는다는데, 일본에서 해일이 일어나서 2만 명이 죽었어요. 몇 억 인구 중에서 2만 명은 그리 큰 비중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지진과 핵폭발에 의해 지구 인구가 60~70% 죽는다는데, 지금 일본에서 일어난 것처럼 이 얼마나 심각하겠어요?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비상식량 확보하고 산으로 올라가서 대비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다 같이 지구 바라보기를 해주자 이거예요. 지구의 고통을 느끼면서 그 고통을 바라봐 주자, 지구를 사랑의 마음으로 안아주자 이겁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화도 많이 냈어요. 지금 일본이 지진과 해일, 핵폭발 위협으로 저렇게 힘든데. 물론 일본 상황이 대양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파도일 뿐이죠.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지만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공의 세계에 빠져있을 수 있겠지만 어차피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표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봐줘야 될 것 아닙니까?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밥을 줘서 생로병사가 없는 세계로 끌어줘야 되고, 아픈 사람은 안 아프도록 해주듯이-물론 이렇게도 안하는 사람이 있지만-마찬가지로 지구는 바라봐 줘야 한다는 겁니다. 몸이 아프든지 마음이 아프든지 그것을 힐링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라봐 줘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대화를 통해서 아~하도록 해주는 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게 마음을 치유하는 거예요. 예전에 자신이 수행을 하면서 나를 바라봐 주었듯이 지금은 상대를 바라봐 줘서 그 마음을 녹여주는 거죠. 이렇게 역시 지구를 바라봐 주자는 말이에요. 그 지구의 생명체도 붓다가 되게 해줘야 된다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지금 제게는 이것이 가장 절실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블랙홀에 들어가 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블랙홀에서 다시 화이트홀로 나와야 된다는 거죠. 나온 사람이, 나와 있다면 사람이 배고파하면 밥 사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목마르면 물주는 것이 맞는 거고. 인터뷰라니까 적나라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보통 때는 실실대는데 이건 얘기해야 될 것 같고, 아마 이 책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나올 때쯤이면 페이스북에서 작업이 어느 정도 진전돼 있지 않을까 싶네요. 아마 다음 주쯤에는 페이스 북에 한글, 영어, 일본어 정도로 올리면서 퍼지기 시작할 거고, 그 밖의 다른 언어권에서 사는 외국인들에게는 자기들 나라 언어로 번역해서 널리 퍼뜨려 달라고 당부할 거예요. 가능한 한 쉬운 언어로 전달을 할 계획이에요.

이제 개인적인 영역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성장기 이야기나 자신의 생의 이력을 좀 개괄적으로나마 얘기해 줄 수 있나요?
그냥 대충 살았어요. 그러나 유일하게 했던 것은 마음공부는 치열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관을 24시간 내내, 즉 잠자면서도 하고, 죽자고 나를 바라보기를 했죠.

마음공부에 입문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뇨, 그냥 갑자기 시작되었습니다. 29살 때쯤 되었을 거예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반야심경을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그 전에는 절에도 한 번도 간 적이 없고, 절이라는 것도 해본 적도 없고,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반야심경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더니 그 생각이 떠나질 않는 거예요. 마치 내 안에 프로그래밍 된 어떤 것처럼 말이죠. 결국은 서점에서 가서 반야심경이라는 책을 한 권 샀어요. 읽는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단번에 다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까 머리 속에 ‘명상’이라는 단어 하나가 남더라고요. 그래서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법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맨 먼저 젖힌 페이지에 사념처(四念處) 관이 있었어요. 몸을 관하고, 호흡을 관하고, 생각과 감정을 관하고, 법을 관하라는 것이 사념처 관인데, 이백 몇 십 가지 명상법을 다 읽어 보았는데 그것이 제일 맘에 들었습니다. 그 때는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것만 팠습니다. 혼자서 미친 놈처럼 이렇게 해보았다가 저렇게 해보았다가 하는데 여러 번 막히고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그래도 그 것 밖에 할 것이 없었어요. 치열하게 했지요. 나중에서야 그것이 석가모니 붓다의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쨌든 당시에는 온통 다 관해나간 거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따라 움직이는 에고를 다 보는 겁니다. 그러다가 잠자는 에고도 보고, 꿈꾸는 에고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숙면일여(熟眠一如)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몽중일여(夢中一如)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그런 경지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그렇게 하다보니까 유체이탈도 하고, 별의별 치유능력이 생겨 암환자도 고쳐보기도 하고, 몸도 18살처럼 젊어지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고 다 버렸습니다. 이런 것에 집착하면 안되지, 안되지 하면서 계속 간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더라고요.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렇게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는데, 그 때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가 잡힌 거예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데 답을 모르겠는 거야, 미치겠는 거야. 그 상태로 폐인 비슷하게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을 때, 화계사가 보였습니다. 거기로 간 거죠.

숭산 스님이 화계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그 때는 그 스님이 유명해지기 전이었어요. 절에 갔더니 큰 스님을 만나봐라 그래요. 큰 스님이 누구냐니까, 숭산 스님이다, 숭산 스님이 누구냐, 처음 들어보았다 하니까 우리나라 3대 선사 중의 한 분이고,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해요. 그럼 약속을 잡아주라, 만나보겠다 했고 그래서 만나 뵈러 간 거죠. 거기서 큰 스님이 질문하라고 해서 질문하는데 냅다 소리를 지르는데, 그 때 웃음이 팍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 때는 그 웃음이 뭔지 몰랐습니다. 스님이 검지를 들어 보이며 ‘이게 뭐꼬’하고 물으라고 해요. 그래서 조실방 앞을 나서면서 스님이 가르쳐주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이 뭐꼬?” 한 거지요. “웃는 이것(웃음이 터졌으니 웃는 그것)이 도대체 뭐꼬?” 딱 한 번 했는데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었어요. 그러고는 비가 오는 날인데 거기서부터 2킬로미터 정도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내려갔어요. 수유 네거리까지 그렇게 내려가다가 뒤늦게서야 내가 인사를 안 드리고 왔다는 생각에 미친 거예요.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고 다시 올라갔더니 어떤 스님이 서 있다가 내가 너무 좋아하고 있으니까 ‘희마(憙魔)’라는 게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것도 마(魔) 아닙니까? 그래. 내가 그 스님보고 “조주 선사가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는 물음에 왜 무(無)라고 했는지 아세요?” 물으니까 그 스님이 “왜 했습니까?” 그래요. 그래 내가 왜 했냐, 안했냐? 하니까 무(無) 했죠. 그러고는 내려왔습니다.

그 뒤 “큰 스님이 오시라는데요” 해서 갔는데 그 때부터 숭산 스님과 일종의 인터뷰를 하면서 맨 날 깨진 거예요. “아니다, 아니다!” 답을 해도 “아니다!”하는 거예요. 그러다 하루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오늘은 기어이 숭산을 꺾고 와야겠다 결의에 차, 스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숭산 스님이 “나 오늘은 몸이 불편해서 인터뷰를 못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내가 노인네를 거꾸러뜨린다.’ 하면서 슬그머니 마음을 내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선문답의 세계에서 보면 그 때 벌써 내가 진 거였던 거예요. 이미 게임 끝난 거죠. 그 상태에서 스님이, “부처님은 설산에서 7년을 고생했는데, 너는 1주일간만 참선을 해라, 1주일 뒤에 점검을 하겠다.” 하고 선방에 들어가라고 해요. 그런데 당시 한국 스님 입장에서는 그 상황이 용납이 안 되었던 모양이에요. 행자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머리도 안 깎은 녀석을, 외국인도 아닌 녀석을 그렇게 집어넣으니까 받아들이기 힘들어 해요. 그래서 속으로 역시 ‘개는 뼈다귀를 쫓는구나.’ 하고 나왔지요. 범은 사람을 물지만 개는 뼈다귀를 쫓잖아요. 인연이 있었던 건지, 없었던 건지. 그러면서 세상구경도 많이 하고 이런 저런 수행법들도 섭렵해 보았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고 들어가 봐요. 그러고는 ‘이런 문제점이 있구나.’ 하고, 다시 ‘이런 수행법도 있구나.’ 하고 들어가서 ‘아, 이런 문제점이 있네.’ 하고. 나는 관법과 화두선을 잠깐 한 것이지만 염불도 해보고 뭐, 이런 저런......

그 뒤에 한바다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마하무드라의 노래>라는 것이 내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서 찾아갔어요. 한바다 선생님이 나는 세션도 안 해주고 했는데 책으로 많이 도움을 주셨어요. <쿤달리니 탄트라>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읽으면서 해당 챠크라들이 다 터진 거예요. 예를 들면 물라다라 편을 읽으면 물라다라가 터지고, 마니뿌라,아나하타 등등 이렇게 쭉쭉쭉 터진 거야. 읽으면서 체화시키고 그 다음을 또 읽고. 또 티벳 불교를 이해하는 계기도 생기는 것 같아서 보고 있는 거죠. 조주 선사가 자리를 잡은 게 나이 여든인가, 아흔인가잖아요. 아직 나이가 마흔 넷이니까, 공부 좀 하다가...... 하지만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변형시켜서 궁극적 진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죠. 나는 아직 공부를 많이 해야 되겠죠.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중시하는데, 법화경을 중시하는 흐름도 좀 보고, 티벳 불교도 인연 따라 조금씩 이해를 하고, 어떻게 보면 세상도 구경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부분도 구경하고 있죠. 구경은 하는데, 지금 급하고 중요한 것은 지금 있는 고통에 대해 대응을 해줄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자기 엄마가 뇌혈관이 터져 당장 죽게 돼 있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인간과 동물과 온갖 생명이 살고 있는 지구 생명체의 근본이 아프단 말에요. 급한 건 빨리빨리 봐야 할 것 아니에요. 세세생생(世世生生) 보살이 목표여야 해요. 붓다가 목표가 아니라. 육조단경에 보면 혜능스님이 이렇게 써놨어요.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 움직이면 보살이다.” 그런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견해, 법화경에 의하면 보살도를 닦아야만 부처가 된다고 해요. 모르겠어요. 나는 몰라요. 다만 우리는 하나라는 거고, 상대가 아프면 내가 아픈 거고. 안 아픈 방향으로 가고 서로 행복한 방향으로 가야될 것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부터, 지금 여기서 관계가 있어야지? 아프면 같이 아프고, 기쁘면 더욱더 기쁘게 하고...... 공(空)이란, 무아(無我)란 좋은 거예요. 그것은 100%의 사랑, 보살도예요. 한바다님도 아픈 사람들 보면 왜 나한테 왔냐 하면서도 힐링을 해주고, 뭐라고 야단하다가도 치료를 하시죠. 그 정도는 되어야죠. (이상.)

지구가 새로운 시공간대로 진입하고 있다-흔들기

한바다님 메시지 모음 ---------------------------------------------





흔들리는 지구,
지구는 새로운 에너지의 시공간대로 진입하고 있다



일본의 지진과 해일, 대규모 원전발전소 화재와 폭발로 인한 불안과 공포가 어느 정도 안정화 돼가고 있다. 전 세계인이 크나큰 애정으로 일본을 위해 기도하고 모금으로 물품과 구조 지원을 함께 하고 있다. 한바다님은 일본의 최근 사태를 계기로 대규모 참사를 초래할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인 핵과 원자력을 해체하기 위한 단계적인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한다. 한바다님은 일본의 사태 양상은 앞으로 지구가 어떤 혼란과 어려움을 당할지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또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개연성이 높은 데 이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갈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신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이가 불안에 잠식당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이 변화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보다 큰 나로 태어날 것을, 전 지구적으로 인류가 각성하여 의식적 변형과 상승을 가져오는 기회로 삼을 것을 당부한다. 지구 어머니와 그 안에 사는 많은 생명들의 희생이 최소화할 수 있도록 깨어 명상하고 사랑으로, 한마음으로 대응해 갈 것을 얘기한다. 홈피에 올라온 최근의 메시지들을 옮겨 싣는다.



1

관점을 비우고 일체한 마음의식(전체의식)에 눈뜰 때이다

쓰나미 지진 참사를 겪은 많은 생명들에 깊은 조의를 표한다. 이 크나큰 참사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일본인 형제들의 자세에 존경을 표한다. 이미 예언들을 통해서 예견되긴 했지만 전 지구에 일어나는 일들은 단지 개체적 의식으로 감당하기는 너무 크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리가 사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아야 한다. 자원착취와 생명의 큰 희생을 전제로 하고 경제적 이익의 관점에만 올인하고 있는 이 문명이 정당한 것인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전체의식의 사랑이 깨어나길 빈다.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진통이 좀 약화된 형태로 나아가길 기도한다. 불안에 떠는 여러분들 내면의 눈에 집중하고 가슴의 태양을 명상하십시오. 불안을 명상으로 삼으세요. 그리고 모금에 동참하십시오.



2

가슴의 소리-일본 대지진이 우리에게 주는 것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감동...... 누가 자기 생명이 아깝지 않으랴. 누가 죽음이 두렵지 않으랴. 누가 자신의 미래가 아깝지 않으랴. 그럼에도 의연히 전체를 구하기 위해 불나방처럼 가느다란 희망에 온몸을 던지는 181人의 의연한 결의에 그냥 눈물이 흐른다. 모두들 실시간으로 소개되는 일본 대지진 참사의 현장과 최악의 가능성과 희망에 마음 졸이며 어수선한 마음, 흔들리는 마음. 그러나 사람들과 일본 대지진의 참사를 이야기 하면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다. 그들의 의연한 태도와 침착성에, 늘 경쟁시하며 의심의 눈으로 보기만 했던 한 나라를, 우리는 놀람과 진정한 관심과 사랑으로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나다. 그들이 아프다면 우리 또한 언젠가 아플 것이다.

나는 새벽에 간세이 원전에 대해 명상하고 안전을 기도하면서 여기에는 물질적인 위험을 넘어선 영적인 섭리가 분명히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희생과 용서,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깨어나는 인류의 의식상승이 눈에 선하다.



3


지구의 회생을 위하여 명상하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일본까지 갈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도울 수 있는 길은 많을 것이다. 해피타오 가족 여러분, 모두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진심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일본의 대지진과 원전이 있는 곳으로 의식을 보내서사랑과 안전, 평화의 염(念)을 보냅시다.

육체는 시공의 한계가 있지만 마음과 영혼은 한계가 없으니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그곳으로 투사시켜 지금 위험을 줄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애쓰는 분들에게 안전과 사랑, 평화와 감사의 염(念)을 보냅시다. 우리가 마음을 합친다면 지구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펑크가 나서 신음하는 우리 생명의 모체(母體)인 지구를 위해 명상합시다.



4


엄청난 재앙과 큰일에 대한 진리적 태도

이 모든 일이 나를 깨워내기 위해 일어나고 있다. 재난도, 고통도, 내 자비심을 깨워내기 위해 존재한다. 쓰나미도, 슈퍼문(super moon)도, 2012년도, 전쟁도, 불화도 지구에 있는 모든 이들 속에 있는 ‘참된 나‘를 깨워내기 위해 일어나고 있다.

신은 고난 속에 축배(祝杯)를 감추고 있다. 그 축배는 각성(覺性)이라는 이름의 축배(祝杯)이다. 이 축배(祝杯)를 받아 마실 자, 바로 그대임을 잊지 말라.


2011. 3.

12.09.2010

2010년 해피타오 송년회 영상 -헬렌켈러...그리고 구루

happytao: Meditation master Hanbada.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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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막힘없이 흐르게 하라

마음이 막힘없이 흐르게 하라




두뇌적 의식을 평온하게 조율된 심장에 귀의시키십시오. 머리와 가슴이 하나로 만나면 온전하게 흘러갑니다. 마음이 마음을 만나주면 모든 카르마적 저항은 녹아지고 거대한 하나의 바다가 됩니다. 마음이 저항없이 흐를 때 ‘나란 의식’도, ‘너와 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만나주면 상대방의 마음(심정)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전우주적인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상대방 속의 에센스를 만나면 ‘나’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우주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제자가 세상을 해매이며 살다가 스승에게 옵니다. 스승은 그의 영적인 기운을 불어 넣어줍니다. 이 한 번의 불어넣어줌으로 제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근원적 떨림(레파토리), 영혼의 울림이 되살아납니다. 신비입니다. 그 아무리 악하게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붓다적 존재와 단 한 번의 공감(共感)으로 선인(善人)으로 되고, 붓다의 길에 입문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1

마음은 가능성의 공간으로서 마음이 열릴 때는 바다와 같습니다. 마음이 닫힐 때는 좁아집니다. 마음이 닫힐 때를 보면 주로 한정된 나를 인식하면서 한계를 설정합니다. 세상 속에서는 ‘내 것’ ‘네 것’이 분명하고 ‘이것은 할 수 있고 저것은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들어와 보면 여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계설정을 어떻게 합니까? 과거의 시간, 과거의 지식과 경험되어진 인식을 미래로 가져옵니다. 일종의 예측인데 과거에 이랬기 때문에 미래도 그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정은 실재가 아니고 단지 하나의 생각입니다. 생각은 어떤 형태를 부여하면서 방향이나 범위를 설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때문에 생각을 정확히 하지 않을 때는 초점이 잘 안 잡힙니다. 생각은 초점을 잡아줍니다. 이 생각은 공간적인 목표지점을 명확히 설정해주는 측면도 있지만 잠재적인 내 마음도 설정을 합니다. ‘이것 정도 밖에 할 수 없을 거야’ 하는 식으로. 마음이 이렇게 설정되면 설정된 그 상태로 그것만을 보고 그것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의 마음은 그렇게 설정되지 않습니다. 설정되어진 것은 단지 내 생각 차원의 일이고 그 생각 너머가 가능성의 영역입니다. 설정한다는 것은 곧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가 이만큼 할 수 있다고 설정(생각)하면 그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내 마음이 거기에 묶여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기능을 도와줍니다. 내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지금 현재 여러분들은 ‘나’라는 인식이 약해지고 ‘나’ 너머에 있는 마음의 근원적인 부분이 많이 펼쳐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매우 평화롭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 것에 부딪히지 않고 흘러나올 때 평화를 경험합니다. 이때에는 ‘나’라는 인식과 작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어떤 감각이나 감정에 걸리면 의식에서 저항된 그 감정과 감각의 데이터를 가지고 두뇌가 나란 것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아프다’라고 만듭니다. 실제로 마음이라는 것은 우주처럼 변화무쌍하면서도 영원한 것이지만 깨어나지 못하면 ‘나’라는 것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들 속에서는 그 영원하지 않은 ‘나’가 지속적으로 되풀이 됩니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합시다. 두들겨 맞은 것은 사실이고, 두들겨 맞을 때 아팠던 것은 감각, 그 때 두렵고 기분 나쁨 등의 감정이 있었겠지요? 맞았던 사실, 아팠던 감각은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끝난 거지요. 그런데 누가 두들겨 맞았습니까? 나가 맞았습니까? 몸이 맞았습니다. 몸이 아팠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두뇌가 그 생각(기억)을 재생하면서 아직도 계속 맞고 있습니다. 이미 끝난 옛날이지만 옛날에 두들겨 맞을 때 강하게 저항했고 다시는 안 맞겠다고 결심했던 ‘나’가 있었다면 현재도 이 ‘나’가 있어서 옛날을 현재로 불러들이면서 그것을 현실로 만듭니다. 현실로서 다시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맞을 당시 맞는다는 사실에 대처만 하면 되었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머리로 도피하면서 이 경험을 증폭시키고 이 아팠던 경험에 의식이 잠식당하면서 맞았던 ‘나’를 계속 들고 있습니다. ‘나’가 빠지면 없는데 그때 잠식당한 의식이 아픈 ‘나’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기억일 뿐인데 기억에 ‘나’(란 의식)를 결합시키면서 나는 계속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현실 속에는 그런 기억이 있을 뿐이고 맞은 나는 없습니다. 내가 빠지면 순수한 경험만 일어납니다.

청중질문 : 수많은 경험 속에 있으면서 그 때마다 ‘나’가 빠진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마음이 경험하면 됩니다. ‘나’는 그 경험을 100%(있는 그대로) 안 받아들이고 저항하면서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도피하잖아요? 그럴 때 그 ‘나’가 부정적인 형태로 구겨지면서 이 경험과 결합하게 돼 있습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저항할 때 이 ‘나’가 만들어집니다. 이완한 상태로 저항 없이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흘러넘칩니다. 여러분들은 흘러넘치는 마음의 상태를 충분히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2

비파사나의 사성제 가운데 하나인 무상(無常)이 의미하는 것은 그 어떤 대상의 작용도 현상도 영원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것이 오고 가며 명멸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비파사나의 원래적 목적은 관(觀)- 생각이나 감각, 욕구에 대해서 분별없이 지켜보면서 어떤 한 생각도 감정도, 감각도 영원하지 않다, 덧없다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도 감각도 명멸하는 현상일 뿐인데 지속한다고 착각(無智)하고 있지요. 비파사나를 수련하는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관하면서 일어나는 생각에 관찰하는 데 집중돼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비파사나를 하면서 생각이 아니라 생각과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공간, 대상이 명멸하는 빈 공간을 보아야 합니다. 무상(無常)을 가치관적으로 따지면 세속은 무의미하고 덧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해보니까 무상(無常)의 실제 뜻은 ‘괜찮다’, ‘안심하라’는 의미더라는 겁니다. 명멸하는 현상들을 지극하게 관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맑고 명징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자각의 파장이 흐르는 거지요. 인식력도 뚜렷해집니다. 이것만을 목적으로 하면 이런 저런 금기를 갖게 되겠지요. 그러나 투명하고 맑은 의식상태 자체를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은 삶의 풍요로움에 접속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명징하고 투명함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그 투명함을 바탕으로 세상에 적절히 대응하고 삶 속에서 뭔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총체적인 지혜나 힘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명징함을 추구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명징함 그 자체보다도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의 배후의 공간에 존재하는 영역에 관심이 갑니다. 모든 한 생각은 언어화된 정보이자 어떤 기준을 내포하고 있고, 그 한 생각을 통해서 우리가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생각은 늘 흐르고 우리가 반드시 어떤 세계로 들어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 공간을 의식하면서 존재 자체로 있어봅니다. 이 공간은 가능성의 상태입니다. 이완된 상태로 있어봅니다. 이완된다는 것은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머물고(現存) 있으면서 심장이나 어깨, 목의 긴장을 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내면의 공간으로 흐르는 생명의 파장,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평화의 파장에 의식이 귀의(歸依)합니다. 의식을 그 파장에 맞춰주면서 존재적 상태를 가만히 듣고 있는 상태로 있어봅니다(吟味). 그러면 마음이 생각으로 이탈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을 명상해야 합니다.

물론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의식과 심장(心波)을 통일시켜주고 있는 상태가 가장 건강한 상태입니다. 이 때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됩니다. 그 상태에서 뇌파 자체가 고도로 명징해지는 상태로 진입하면 더욱더 좋겠지요. 그것은 어떻게 오느냐? 우리의 두뇌 안에는 진을 치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이 있고 우리의 의식이 생각들을 따라다니느라 바쁜데 이런 복잡하고 거친 생각들은 목뒤를 긴장시키고 심장을 조여들게 합니다. 의식을 목뒤로 보내서 이완해주고 다시 심장으로 의식을 보내서 심장까지 이완해주면 기본적으로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명징성(자각력)은 뇌파가 변형될 때 옵니다. 뇌파를 떨어뜨리고 안정시키는 것 중 호흡법의 일종인 중호흡(양코호흡)법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한쪽 콧구멍만 열려 있지만 양코가 동시에 열려 있을 때에는 의식이 선명하고 명징해집니다. 그러면서 뇌파가 변하고 잡생각이 사라지면서 두뇌 안의 센터들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생각이 툭 떨어집니다. 생각과 의식의 간격이 벌려지는 거지요. 의식이 심장으로 들어오게 되면(귀의하면) 평온함이 유지되다 어느 순간 백회가 열립니다. 백회를 막고 있는 생각들이 떨어지면서 백회와 영안과 심장이 하나의 통로로 일체화되면서 고요하면서 텅비어 있는 상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돌아가고 다시 고요함으로, 이렇게 왔다갔다 하다가 고요한 상태가 더 커지게 되면 나중에는 생각과 무의식까지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생각으로는 이런 상태로 갈 수 없습니다.

도(道)의 맥(脈)은 항상 존재하고 우리의 내면에 늘 흐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생각을 하고 죄를 짓더라도 자아적 측면에서만 근원적 생명의 지혜가 멀고 막혀져 있지 존재 전체 안에는 이것이 항상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괜찮다는 겁니다. 자아는 생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흐름과 멀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존재 안에 우주와 연결된 그 흐름이 변함없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이 진짜 나입니다. 실재의 나는 이것이지만 현상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두뇌가 만들어낸 자아가 일시적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수고 하고 있는 거지요. (중략)


3

우리가 사랑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값진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값진 본질이기 때문에 사랑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형상을 넘어 상대방 속의 근원적 빛과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영원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빛을 만나서 하나가 되도록 하세요. 하나로 녹아드세요. 그러면 알게 됩니다. 삶의 비밀을, 그리고 우주의 비밀마저 당신의 가슴 속에서 뚜렷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울림, 그것이 참사랑입니다. 그러나 욕구나 상처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잃어버립니다. 싸움으로 인해서 상대방의 본질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욕구와 상처를 빼고 보세요. 순수한 열망만으로 우리는 상대방의 본질과 만날 수 있고 상대방의 본질을 만났을 때 그것은 곧 자신의 본질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 그대는 완전한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기억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영원함을 증거해 주는 힘입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예수는 그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러 왔습니다. 에고가 사랑을 만나면 죽게 됩니다. 에고는 그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에고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에고의 욕구와 상처를 비워야 합니다. 그것을 비웠을 때 그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영원성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원성을 깨워줍니다. 단 한 번이라도 참된 사랑을 만난다면 여러분들에게 그 사랑은 영원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 한 순간의 사랑의 발견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영원히 힘든 이 세상을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꼭 그런 사랑을 만날 수 있게 하세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 안에 그것을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눈뜬다면 상대방 속의 빛과 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이것을 봅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형상 너머 상대방 속의 빛과 가능성을 보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가 내게 그랬을 것입니다, 거룩한 이는 온전함을 증거해 주는 자라고. 신은 우리를 부족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신은 우리 가장 내면에 존재하는 에센스를 보아주는 겁니다. 우리는 신의 분신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신이 우리를 봅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에고의 작품일 뿐입니다. 신은 우리 안의 가능성, 에센스를 보아주기 때문에 기독교 성서에서처럼 “보기에 좋았다”라는 표현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엄청난 위대함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를 넘어서 있습니다.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 힘은 빛과 사랑입니다. 눈이 열리면 그것을 알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가되 개인적인 욕구와 상처를 빼고 보면 만날 수 있습니다. 욕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욕구 너머의 차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빼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우주적인 것으로 우리를 지속적으로 키워주는 힘이 됩니다. 실제로 지구가 생명을 키워내는 것도 엄청난 사랑의 힘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키워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주는 거대한 사랑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적 세계 차원을 보면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사랑의 빛이 작용하고 있고, 우리가 형상 너머의 그 세계를 볼 때 우리의 마음에서 갈등과 투쟁이 끝납니다. 형상의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원의 눈을 뜨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고 영원한 우주의 신비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삶은 바로 그런 영원의 눈을 뜬 사람들에게는 천국이고, 뜨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메마른 사막과 같은 세계입니다. 우리가 동시에 그런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세계를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측면에 포커싱하고 어떤 눈을 뜨고 사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유아기를 갓 벗어난 사춘기의 청소년과 같은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전쟁과 갈등, 폭력과 투쟁, 고뇌로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지구적 삶에 간간히 축제가 있고 간간이 휴식이 있습니다. 성자들은 지구가 위대한 신비와 사랑으로 충만한 행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가끔씩 이 세상을 방문합니다. 지혜서와 안내들을 통해 그 문을 열어보여 주지요. 그들은 이 사랑의 역사에 동참하라고 합니다. 일상 공간에서 우리는 사랑 때문에 많은 갈등을 하고 싸우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은 그 어떤 사랑이라도 이 영원한 사랑의 한 반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서 사랑을 느꼈든, 내가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게 사랑을 준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겁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삶은 사막과도 같이 황량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느꼈던 존재들, 나를 사랑했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를 전하세요.

* 위 내용은 한바다님이 진행한 2010년 9월과 10월 메인세션 기간 중의 메시지를 녹취,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