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소상 이상훈으로부터 듣다
지구 바라봐주기 운동을 제안한다
2011년 3월 21일 이른 저녁, 양재역 부근 커피숍에서 소상(笑象) 이상훈님을 만났다. 그는 우리들 사이에서 관법(灌法)과 화두선(話頭禪)에 상당히 정통한 이로 알려져 있으며 몇 차례에 걸쳐서 격월간 <해피타오>에 실린 회원칼럼을 통해 그 일단과 면모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번에 만남은 일본상황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있는 지구적 과제, 우리의 대응에 대한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그에 의하면 관법의 이해 실천편에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한다. 진지한 열정으로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던 그의 얘기들을 옮겨 적는다.
먼저 그가 요즘 지구가 겪고 있는 느낌은 어떨까? 의외로 대답은 간단하다.
전체적인 흐름이나 향방은 잘 모르겠고 다만 기운이 강해지고 있는 느낌은 있어요.
이어 바로 요즘 그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 사안으로 재빠르게 급선회, 해피타오 가족을 비롯한 다른 모든 분들에게 제안을 하고 싶단다.
요즘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들을 이용해서 뭘 좀 하려고 합니다. 해피타오 식구들도 같이 참여해서 이게 전 세계적으로 퍼뜨려졌으면 좋겠어요. 다들 예언을 해요. 예를 들어서 상원사에 계셨던 탄허 스님이라고, 1983이미 입적하신 분이지만 한국과 지구의 미래에 대해 여러 예언을 했어요. 북극해의 얼음이 녹으면서 지구인구의 60~70%가 죽는다거나, 지진과 원자핵 폭발에 의한 인류의 희생 등에 대해 예언을 했잖아요. 한바다님의 <3천년의 약속>에도 지구대변동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화성소년 보리스카도 그런 얘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고, 인류대재앙과 환란에 대한 기독교 성서에도 그런 얘기들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답답한 것은 온통 죽는다는 얘기는 있는데, 어떻게 하면 지구와 환란에 처한 인류를 구할 것인가 하는 얘기는 없어요. 지금 시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지구를 관(觀)해주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구와 하나가 되어 명상을 한다든가, 지구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 큰 애정으로 감싸주는 등 각자가 자기 나름의 수준과 방식에 따라 지구 봐주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는 것이 좋고, 소수가 동참하다가 점차 수백, 수천의 사람들, 나아가 전 세계인들이 그렇게 해나갈 때 나는 분명히 지구가 치유된다고 봅니다. 나는 관(觀)만이 업을 사그라뜨릴 수 있는 있는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격월간 <해피타오>에 그가 연재한 글에서 이미 관(觀)에 대한 그의 견해, 즉 관이란 무엇인가, 관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관을 통한 업식의 소멸원리 등이 설명돼 있다. 글에서 지구바라보기, 관(觀)을 통해 어떻게 지구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가에 대한 의아스러움에 답하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다소 길지만 옮겨본다.
관법觀法이란 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무런 기준이나 기대 없이, 즉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호흡, 자신의 몸과 동작, 자신의 생각과 감정, 더 나아가 자신의 육근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따라 움직이는 자신의 모든 의식을 의도 없이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에고 활동을 바라보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도 없이’ 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식으로 의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법 수행이 왜, 또 어떤 이유로 업을, 에고를 소멸하는 걸까요? 양자역학에서는 광자나 전자 같은 소립자는 입자로 혹은 파동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그것이 입자로 혹은 파동으로 존재할까요? 그것은 입자를 관찰하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른 것입니다. 즉, 이를 입자로서 보고자 하면 입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관찰하는 주체가 없다면, 즉 관찰한다는 의도가 없다면 이것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론이 아닐 수 없지요. 결국 소립자는 관찰자의 생각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입자가 입자이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입자는 관찰자의 생각의 반영입니다. 이를 불교적으로 환원하면 입자는 결국 업인 것입니다.
물론 업은 단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업이란 처음에 한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또 그러한 생각이 반복되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으며 그것에 대한 개인의 호ㆍ불호의 경향성으로 나타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끼리 서로 작용과 반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를 양자역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이 세상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면 소립자들은 그 생각대로 입자를 구성하며 그것이 화학적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대상들은 우리의 생각에 의해 가능성의 파동의 상태에서 고정된 입자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이를 심리 상태의 과정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을 내용인데도 자신에게는 과거의 기억, 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정한 경향성으로 인해 타인의 말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 화는 체내에서 어떠한 화학적 성격을 지닌 물질을 발생시켜 그것이 얼굴을 붉게 만들며 그 타인에게 화를 표출하고 이는 몸의 균형을 깨뜨려 그것이 지속이 되면 몸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의도 없이 바라보아 소멸시키는 것이 관입니다. 관은 의도 없이, 그리고 선택 없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미 고정화되어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는 육체 또는 마음의 상태를 다시 가능성만 존재하는 공空의 상태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인식할까요? 이 몸과 그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것이 ‘나’라고 인식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고정시키는 시각입니다. 결국 스스로를 입자화, 즉 물질화시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정 지어진 ‘나’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끌고 가는 주인의 삶이 아니라 생각에 끌려가는, 경향성에 끌려가는 노예의 삶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아무런 의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일, 즉 관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입자로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과 밖이 교류할 있는, 생명력이 넘쳐날 수 있는 자유로운 파동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업을 해소하는 길입니다. 관은 바로 업을 정화해 나가는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이며 새로운 창조를 위한 준비입니다.
여기서 ‘의도 없이’, ‘선택 없이’란 표현은 바로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으로 음도 양도(색) 아닌 중도(공)의 표현으로, 양자역학에서의 관찰자 없는 바라봄, 즉 의도 없는 마음입니다. 선가의 3조 승찬 선사는 <신심명>이라는 글의 첫머리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다만 간택을 꺼릴 따름이라. 미워하고 좋아하고 하는 마음만 버린다면 지극한 도는 명백하리니.”라고 말합니다. 분별심 없는 마음이 곧 진리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계속 하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란이 지구가 가지고 있는 업(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지구가 지금 소녀에서 성인여자로 바뀌어 가고 있는 과정에서 치루는 생리통이라 말하고 있는 사람, 혹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이다, 아니다 지구내부가 더워지고 있어서 그렇다 등등 여러 해석과 의견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맞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게 사실이다, 이게 팩트다, 지구인의 반이 죽는다, 90%가 죽는다, 뭐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는 겁니다. 어떤 분은 지금 여기에 100% 머물러 있으면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만, 나는 그 사람이 정말 마음공부 하는 사람인지 의아스럽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100% 존재하는 사람이 과연 지구상에 몇 명이나 될 것이며,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죽어가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할 지구 전체의 운명을 봤을 때,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공부의 목적, 마음공부의 목적과 목표를 상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데로 넘어가면 보살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 내가 쓴 글에도 그런 내용이 언급돼 있을 겁니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로 목숨을 걸고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려면 보살도가 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붓다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붓다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아요. 붓다가 되어 100% 있다, 그것은 붓다가 아닙니다.
그러면 지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한 개인의 업을 녹이기 위해서 관을 시키듯이, 지구라는 행성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우리가 같이 지구의 고통과 통증을 바라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녹는다 이겁니다. 관이라는 것을 전문적으로 해본 사람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건데요,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관하고 명상을 하면 됩니다. 지구를 떠올리며 애정으로 바라봐 줘도 될 거고, 지구를 느끼면서 진아(공)의 자리에서 무심으로 함께 하는 수도 있겠습니다. 동시에 지구를 느끼면서. 동시에 느끼면 내 육체적 아픔이 있겠지만, 항상 진아의 마음으로 육체와 지구를 하나로 연결시켜서 바라보자는 거죠. 다같이. 한바다님과 지난 주에 만나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순간에도 계속 일본을 관하며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일본이 안정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 이제 일본이 괜찮은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한바다님께서도 동참해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페이스북이나 이런 것을 통해 가지고 전 세계에 퍼뜨려보자는 거죠. 지구가 환란이 일어나는 것을 다 막지는 못할지라도 완화시켜 보자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많은 개체적 생명들을 살려낼 수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보살도(菩薩道) 중에서도 진리를 깨치게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보살도지만, 법화경에서도 나와 있듯이 일단 그 사람이 겪고 있는 현재의 고통을 덜어주면서 다음 스텝으로, 근본적인 인간고들, 즉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봐요. 지금 당장의 고통도 덜어주지 못하면서, 생로병사 문제도 도와주지 못 하면서 자기 혼자 지금 여기에 100%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나는 이해가 안 됩니다. 도가 낮아서 그런가 봐요. 지금 저는 이것을 하자고 계속 주변에 얘기하고 다니고 있어요. 내가 페이스북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동참을 촉구할 거예요. 많은 지구인들이 함께 할 거라 생각합니다.
(잠시 침묵) 마주 앉아 듣고만 있는데 그의 절실함과 진실한 마음에 감응되면서 따스한 감동이 일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지진이 터지기 전 날인가 갑자기 내면에서 ‘지구를 구원할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3일인가 4일인가 기도를 했는데, 응답이 페이스 북이에요. 왜 응답이 페이스북일까 의아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다 같이 관을 하자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바다님이 적극 나서 주시고, 스님들 화두선 하는 것 잠깐 멈추시고, 기독교인들 역시 기도로 동참해주시고, 모두들 지구 바라봐주기를 합시다 이거죠. 이게 개개인 차원에서는 대단치 않게 여겨질수도 있어요. 그러나 전체적인 차원에서는 상상이상으로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 많은 종교인들이 일본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설령 지금 지구의 몸살이 지구의 업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자연재해라 치더라도, 지구의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성장통이라 할지라도, 지구의 고통을 좀 덜어주자, 생리통이 일어나는 것을 좀 덜어주자, 좀 덜 아플 수 있도록 해주자, 그것을 통해서 또한 되도록 적은 희생에 그치도록 하자 그거에요. 이런 취지로 생각했던 건데 타이밍을 약간 놓친 감은 있어요. 일본이 안정화되면서 좀 게으르고 싶은 마음이 약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면, 그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기운을 많이 받는 것을 좋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좋은 기운으로 지구 바라보기를 해주자 이거죠. 우리가 사람을 치유할 때도 사실은 그 사람을 나와 하나로 느껴서(관해서) 녹여주는 거거든요. 그것이 힐링의 과정인데 지구 바라보기도 같은 맥락이거든요. 힐링 방법론에 관한 얘긴데 예전에 제가 관법에 대하여 처음 썼을 때 그런 내용이 있어요. 마음적으로 관이 무엇이냐 하는 사상적 이론의 이해부분이었다면, 오늘 제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것의 실천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내용의 발기문과 취지 등을 영문과 일본어로 준비하고 있어요. 일본이 안정화되었지만,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즉 또 다른 재해가 발생한다면 지속적으로 퍼져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해피타오 가족 여러분들도 가족들은 물론, 친구와 동창들에게 알리고 함께 하자고 말씀드립시다. 지구 바라보기 운동(가칭) 법화(法華) 형에게도 얘기했더니 동참하겠다, 친구들에게도 얘기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앞으로 흐름은 어떻게 될 것 같나요? 혹 잡혀지는 것들 있어요?
(고개를 흔들며)몰라요, 난 그런 거 몰라요. 그냥 지금 고통스러운 것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요.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이고 지구가 겪고 있는 고통을 느낄 뿐이에요. 지금 지구적으로 기운이 강해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느껴보면 지구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 고통, 괴로움도 파워일 수 있는 거예요. 지구 내부에서 끓고 있으니까 힘이 솟고 있는 것 같지만, 지구 전체적으로 괴롭다고요. 앞에서 괴로우면 괴롭잖아요. 이게 정상적인 거죠. 지금 여기가 괴롭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 괴로움을 없애야지, 그렇잖아요? 지금 배고프다는데 라면이라도 끓여줘야지, 내일 뷔페 약속을 하면 뭐해? 나는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고, 그런 능력도 안 되지만,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런 시기에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자는 말이 선적으로 맞을 수는 있습니다(그것은 차원에 따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겠지만, 공부도 모르고 윤회를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하게 되는데, 핵폭발에 의해서 지구 인류가 60~70% 정도가 죽는다는데, 일본에서 해일이 일어나서 2만 명이 죽었어요. 몇 억 인구 중에서 2만 명은 그리 큰 비중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지진과 핵폭발에 의해 지구 인구가 60~70% 죽는다는데, 지금 일본에서 일어난 것처럼 이 얼마나 심각하겠어요?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비상식량 확보하고 산으로 올라가서 대비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다 같이 지구 바라보기를 해주자 이거예요. 지구의 고통을 느끼면서 그 고통을 바라봐 주자, 지구를 사랑의 마음으로 안아주자 이겁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화도 많이 냈어요. 지금 일본이 지진과 해일, 핵폭발 위협으로 저렇게 힘든데. 물론 일본 상황이 대양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파도일 뿐이죠.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지만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공의 세계에 빠져있을 수 있겠지만 어차피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표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봐줘야 될 것 아닙니까?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밥을 줘서 생로병사가 없는 세계로 끌어줘야 되고, 아픈 사람은 안 아프도록 해주듯이-물론 이렇게도 안하는 사람이 있지만-마찬가지로 지구는 바라봐 줘야 한다는 겁니다. 몸이 아프든지 마음이 아프든지 그것을 힐링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라봐 줘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대화를 통해서 아~하도록 해주는 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게 마음을 치유하는 거예요. 예전에 자신이 수행을 하면서 나를 바라봐 주었듯이 지금은 상대를 바라봐 줘서 그 마음을 녹여주는 거죠. 이렇게 역시 지구를 바라봐 주자는 말이에요. 그 지구의 생명체도 붓다가 되게 해줘야 된다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지금 제게는 이것이 가장 절실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블랙홀에 들어가 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블랙홀에서 다시 화이트홀로 나와야 된다는 거죠. 나온 사람이, 나와 있다면 사람이 배고파하면 밥 사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목마르면 물주는 것이 맞는 거고. 인터뷰라니까 적나라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보통 때는 실실대는데 이건 얘기해야 될 것 같고, 아마 이 책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나올 때쯤이면 페이스북에서 작업이 어느 정도 진전돼 있지 않을까 싶네요. 아마 다음 주쯤에는 페이스 북에 한글, 영어, 일본어 정도로 올리면서 퍼지기 시작할 거고, 그 밖의 다른 언어권에서 사는 외국인들에게는 자기들 나라 언어로 번역해서 널리 퍼뜨려 달라고 당부할 거예요. 가능한 한 쉬운 언어로 전달을 할 계획이에요.
이제 개인적인 영역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성장기 이야기나 자신의 생의 이력을 좀 개괄적으로나마 얘기해 줄 수 있나요?
그냥 대충 살았어요. 그러나 유일하게 했던 것은 마음공부는 치열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관을 24시간 내내, 즉 잠자면서도 하고, 죽자고 나를 바라보기를 했죠.
마음공부에 입문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뇨, 그냥 갑자기 시작되었습니다. 29살 때쯤 되었을 거예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반야심경을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그 전에는 절에도 한 번도 간 적이 없고, 절이라는 것도 해본 적도 없고,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반야심경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더니 그 생각이 떠나질 않는 거예요. 마치 내 안에 프로그래밍 된 어떤 것처럼 말이죠. 결국은 서점에서 가서 반야심경이라는 책을 한 권 샀어요. 읽는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단번에 다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까 머리 속에 ‘명상’이라는 단어 하나가 남더라고요. 그래서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법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맨 먼저 젖힌 페이지에 사념처(四念處) 관이 있었어요. 몸을 관하고, 호흡을 관하고, 생각과 감정을 관하고, 법을 관하라는 것이 사념처 관인데, 이백 몇 십 가지 명상법을 다 읽어 보았는데 그것이 제일 맘에 들었습니다. 그 때는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것만 팠습니다. 혼자서 미친 놈처럼 이렇게 해보았다가 저렇게 해보았다가 하는데 여러 번 막히고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그래도 그 것 밖에 할 것이 없었어요. 치열하게 했지요. 나중에서야 그것이 석가모니 붓다의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쨌든 당시에는 온통 다 관해나간 거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따라 움직이는 에고를 다 보는 겁니다. 그러다가 잠자는 에고도 보고, 꿈꾸는 에고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숙면일여(熟眠一如)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몽중일여(夢中一如)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그런 경지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그렇게 하다보니까 유체이탈도 하고, 별의별 치유능력이 생겨 암환자도 고쳐보기도 하고, 몸도 18살처럼 젊어지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고 다 버렸습니다. 이런 것에 집착하면 안되지, 안되지 하면서 계속 간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더라고요.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렇게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는데, 그 때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가 잡힌 거예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데 답을 모르겠는 거야, 미치겠는 거야. 그 상태로 폐인 비슷하게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을 때, 화계사가 보였습니다. 거기로 간 거죠.
숭산 스님이 화계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그 때는 그 스님이 유명해지기 전이었어요. 절에 갔더니 큰 스님을 만나봐라 그래요. 큰 스님이 누구냐니까, 숭산 스님이다, 숭산 스님이 누구냐, 처음 들어보았다 하니까 우리나라 3대 선사 중의 한 분이고,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해요. 그럼 약속을 잡아주라, 만나보겠다 했고 그래서 만나 뵈러 간 거죠. 거기서 큰 스님이 질문하라고 해서 질문하는데 냅다 소리를 지르는데, 그 때 웃음이 팍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 때는 그 웃음이 뭔지 몰랐습니다. 스님이 검지를 들어 보이며 ‘이게 뭐꼬’하고 물으라고 해요. 그래서 조실방 앞을 나서면서 스님이 가르쳐주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이 뭐꼬?” 한 거지요. “웃는 이것(웃음이 터졌으니 웃는 그것)이 도대체 뭐꼬?” 딱 한 번 했는데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었어요. 그러고는 비가 오는 날인데 거기서부터 2킬로미터 정도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내려갔어요. 수유 네거리까지 그렇게 내려가다가 뒤늦게서야 내가 인사를 안 드리고 왔다는 생각에 미친 거예요.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고 다시 올라갔더니 어떤 스님이 서 있다가 내가 너무 좋아하고 있으니까 ‘희마(憙魔)’라는 게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것도 마(魔) 아닙니까? 그래. 내가 그 스님보고 “조주 선사가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는 물음에 왜 무(無)라고 했는지 아세요?” 물으니까 그 스님이 “왜 했습니까?” 그래요. 그래 내가 왜 했냐, 안했냐? 하니까 무(無) 했죠. 그러고는 내려왔습니다.
그 뒤 “큰 스님이 오시라는데요” 해서 갔는데 그 때부터 숭산 스님과 일종의 인터뷰를 하면서 맨 날 깨진 거예요. “아니다, 아니다!” 답을 해도 “아니다!”하는 거예요. 그러다 하루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오늘은 기어이 숭산을 꺾고 와야겠다 결의에 차, 스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숭산 스님이 “나 오늘은 몸이 불편해서 인터뷰를 못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내가 노인네를 거꾸러뜨린다.’ 하면서 슬그머니 마음을 내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선문답의 세계에서 보면 그 때 벌써 내가 진 거였던 거예요. 이미 게임 끝난 거죠. 그 상태에서 스님이, “부처님은 설산에서 7년을 고생했는데, 너는 1주일간만 참선을 해라, 1주일 뒤에 점검을 하겠다.” 하고 선방에 들어가라고 해요. 그런데 당시 한국 스님 입장에서는 그 상황이 용납이 안 되었던 모양이에요. 행자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머리도 안 깎은 녀석을, 외국인도 아닌 녀석을 그렇게 집어넣으니까 받아들이기 힘들어 해요. 그래서 속으로 역시 ‘개는 뼈다귀를 쫓는구나.’ 하고 나왔지요. 범은 사람을 물지만 개는 뼈다귀를 쫓잖아요. 인연이 있었던 건지, 없었던 건지. 그러면서 세상구경도 많이 하고 이런 저런 수행법들도 섭렵해 보았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고 들어가 봐요. 그러고는 ‘이런 문제점이 있구나.’ 하고, 다시 ‘이런 수행법도 있구나.’ 하고 들어가서 ‘아, 이런 문제점이 있네.’ 하고. 나는 관법과 화두선을 잠깐 한 것이지만 염불도 해보고 뭐, 이런 저런......
그 뒤에 한바다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마하무드라의 노래>라는 것이 내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서 찾아갔어요. 한바다 선생님이 나는 세션도 안 해주고 했는데 책으로 많이 도움을 주셨어요. <쿤달리니 탄트라>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읽으면서 해당 챠크라들이 다 터진 거예요. 예를 들면 물라다라 편을 읽으면 물라다라가 터지고, 마니뿌라,아나하타 등등 이렇게 쭉쭉쭉 터진 거야. 읽으면서 체화시키고 그 다음을 또 읽고. 또 티벳 불교를 이해하는 계기도 생기는 것 같아서 보고 있는 거죠. 조주 선사가 자리를 잡은 게 나이 여든인가, 아흔인가잖아요. 아직 나이가 마흔 넷이니까, 공부 좀 하다가...... 하지만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변형시켜서 궁극적 진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죠. 나는 아직 공부를 많이 해야 되겠죠.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중시하는데, 법화경을 중시하는 흐름도 좀 보고, 티벳 불교도 인연 따라 조금씩 이해를 하고, 어떻게 보면 세상도 구경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부분도 구경하고 있죠. 구경은 하는데, 지금 급하고 중요한 것은 지금 있는 고통에 대해 대응을 해줄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자기 엄마가 뇌혈관이 터져 당장 죽게 돼 있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인간과 동물과 온갖 생명이 살고 있는 지구 생명체의 근본이 아프단 말에요. 급한 건 빨리빨리 봐야 할 것 아니에요. 세세생생(世世生生) 보살이 목표여야 해요. 붓다가 목표가 아니라. 육조단경에 보면 혜능스님이 이렇게 써놨어요.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 움직이면 보살이다.” 그런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견해, 법화경에 의하면 보살도를 닦아야만 부처가 된다고 해요. 모르겠어요. 나는 몰라요. 다만 우리는 하나라는 거고, 상대가 아프면 내가 아픈 거고. 안 아픈 방향으로 가고 서로 행복한 방향으로 가야될 것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부터, 지금 여기서 관계가 있어야지? 아프면 같이 아프고, 기쁘면 더욱더 기쁘게 하고...... 공(空)이란, 무아(無我)란 좋은 거예요. 그것은 100%의 사랑, 보살도예요. 한바다님도 아픈 사람들 보면 왜 나한테 왔냐 하면서도 힐링을 해주고, 뭐라고 야단하다가도 치료를 하시죠. 그 정도는 되어야죠.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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