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2010

마음이 막힘없이 흐르게 하라

마음이 막힘없이 흐르게 하라




두뇌적 의식을 평온하게 조율된 심장에 귀의시키십시오. 머리와 가슴이 하나로 만나면 온전하게 흘러갑니다. 마음이 마음을 만나주면 모든 카르마적 저항은 녹아지고 거대한 하나의 바다가 됩니다. 마음이 저항없이 흐를 때 ‘나란 의식’도, ‘너와 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만나주면 상대방의 마음(심정)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전우주적인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상대방 속의 에센스를 만나면 ‘나’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우주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제자가 세상을 해매이며 살다가 스승에게 옵니다. 스승은 그의 영적인 기운을 불어 넣어줍니다. 이 한 번의 불어넣어줌으로 제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근원적 떨림(레파토리), 영혼의 울림이 되살아납니다. 신비입니다. 그 아무리 악하게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붓다적 존재와 단 한 번의 공감(共感)으로 선인(善人)으로 되고, 붓다의 길에 입문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1

마음은 가능성의 공간으로서 마음이 열릴 때는 바다와 같습니다. 마음이 닫힐 때는 좁아집니다. 마음이 닫힐 때를 보면 주로 한정된 나를 인식하면서 한계를 설정합니다. 세상 속에서는 ‘내 것’ ‘네 것’이 분명하고 ‘이것은 할 수 있고 저것은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들어와 보면 여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계설정을 어떻게 합니까? 과거의 시간, 과거의 지식과 경험되어진 인식을 미래로 가져옵니다. 일종의 예측인데 과거에 이랬기 때문에 미래도 그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정은 실재가 아니고 단지 하나의 생각입니다. 생각은 어떤 형태를 부여하면서 방향이나 범위를 설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때문에 생각을 정확히 하지 않을 때는 초점이 잘 안 잡힙니다. 생각은 초점을 잡아줍니다. 이 생각은 공간적인 목표지점을 명확히 설정해주는 측면도 있지만 잠재적인 내 마음도 설정을 합니다. ‘이것 정도 밖에 할 수 없을 거야’ 하는 식으로. 마음이 이렇게 설정되면 설정된 그 상태로 그것만을 보고 그것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의 마음은 그렇게 설정되지 않습니다. 설정되어진 것은 단지 내 생각 차원의 일이고 그 생각 너머가 가능성의 영역입니다. 설정한다는 것은 곧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가 이만큼 할 수 있다고 설정(생각)하면 그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내 마음이 거기에 묶여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기능을 도와줍니다. 내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지금 현재 여러분들은 ‘나’라는 인식이 약해지고 ‘나’ 너머에 있는 마음의 근원적인 부분이 많이 펼쳐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매우 평화롭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 것에 부딪히지 않고 흘러나올 때 평화를 경험합니다. 이때에는 ‘나’라는 인식과 작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어떤 감각이나 감정에 걸리면 의식에서 저항된 그 감정과 감각의 데이터를 가지고 두뇌가 나란 것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아프다’라고 만듭니다. 실제로 마음이라는 것은 우주처럼 변화무쌍하면서도 영원한 것이지만 깨어나지 못하면 ‘나’라는 것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들 속에서는 그 영원하지 않은 ‘나’가 지속적으로 되풀이 됩니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합시다. 두들겨 맞은 것은 사실이고, 두들겨 맞을 때 아팠던 것은 감각, 그 때 두렵고 기분 나쁨 등의 감정이 있었겠지요? 맞았던 사실, 아팠던 감각은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끝난 거지요. 그런데 누가 두들겨 맞았습니까? 나가 맞았습니까? 몸이 맞았습니다. 몸이 아팠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두뇌가 그 생각(기억)을 재생하면서 아직도 계속 맞고 있습니다. 이미 끝난 옛날이지만 옛날에 두들겨 맞을 때 강하게 저항했고 다시는 안 맞겠다고 결심했던 ‘나’가 있었다면 현재도 이 ‘나’가 있어서 옛날을 현재로 불러들이면서 그것을 현실로 만듭니다. 현실로서 다시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맞을 당시 맞는다는 사실에 대처만 하면 되었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머리로 도피하면서 이 경험을 증폭시키고 이 아팠던 경험에 의식이 잠식당하면서 맞았던 ‘나’를 계속 들고 있습니다. ‘나’가 빠지면 없는데 그때 잠식당한 의식이 아픈 ‘나’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기억일 뿐인데 기억에 ‘나’(란 의식)를 결합시키면서 나는 계속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현실 속에는 그런 기억이 있을 뿐이고 맞은 나는 없습니다. 내가 빠지면 순수한 경험만 일어납니다.

청중질문 : 수많은 경험 속에 있으면서 그 때마다 ‘나’가 빠진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마음이 경험하면 됩니다. ‘나’는 그 경험을 100%(있는 그대로) 안 받아들이고 저항하면서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도피하잖아요? 그럴 때 그 ‘나’가 부정적인 형태로 구겨지면서 이 경험과 결합하게 돼 있습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저항할 때 이 ‘나’가 만들어집니다. 이완한 상태로 저항 없이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흘러넘칩니다. 여러분들은 흘러넘치는 마음의 상태를 충분히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2

비파사나의 사성제 가운데 하나인 무상(無常)이 의미하는 것은 그 어떤 대상의 작용도 현상도 영원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것이 오고 가며 명멸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비파사나의 원래적 목적은 관(觀)- 생각이나 감각, 욕구에 대해서 분별없이 지켜보면서 어떤 한 생각도 감정도, 감각도 영원하지 않다, 덧없다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도 감각도 명멸하는 현상일 뿐인데 지속한다고 착각(無智)하고 있지요. 비파사나를 수련하는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관하면서 일어나는 생각에 관찰하는 데 집중돼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비파사나를 하면서 생각이 아니라 생각과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공간, 대상이 명멸하는 빈 공간을 보아야 합니다. 무상(無常)을 가치관적으로 따지면 세속은 무의미하고 덧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해보니까 무상(無常)의 실제 뜻은 ‘괜찮다’, ‘안심하라’는 의미더라는 겁니다. 명멸하는 현상들을 지극하게 관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맑고 명징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자각의 파장이 흐르는 거지요. 인식력도 뚜렷해집니다. 이것만을 목적으로 하면 이런 저런 금기를 갖게 되겠지요. 그러나 투명하고 맑은 의식상태 자체를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은 삶의 풍요로움에 접속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명징하고 투명함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그 투명함을 바탕으로 세상에 적절히 대응하고 삶 속에서 뭔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총체적인 지혜나 힘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명징함을 추구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명징함 그 자체보다도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의 배후의 공간에 존재하는 영역에 관심이 갑니다. 모든 한 생각은 언어화된 정보이자 어떤 기준을 내포하고 있고, 그 한 생각을 통해서 우리가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생각은 늘 흐르고 우리가 반드시 어떤 세계로 들어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 공간을 의식하면서 존재 자체로 있어봅니다. 이 공간은 가능성의 상태입니다. 이완된 상태로 있어봅니다. 이완된다는 것은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머물고(現存) 있으면서 심장이나 어깨, 목의 긴장을 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내면의 공간으로 흐르는 생명의 파장,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평화의 파장에 의식이 귀의(歸依)합니다. 의식을 그 파장에 맞춰주면서 존재적 상태를 가만히 듣고 있는 상태로 있어봅니다(吟味). 그러면 마음이 생각으로 이탈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을 명상해야 합니다.

물론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의식과 심장(心波)을 통일시켜주고 있는 상태가 가장 건강한 상태입니다. 이 때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됩니다. 그 상태에서 뇌파 자체가 고도로 명징해지는 상태로 진입하면 더욱더 좋겠지요. 그것은 어떻게 오느냐? 우리의 두뇌 안에는 진을 치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이 있고 우리의 의식이 생각들을 따라다니느라 바쁜데 이런 복잡하고 거친 생각들은 목뒤를 긴장시키고 심장을 조여들게 합니다. 의식을 목뒤로 보내서 이완해주고 다시 심장으로 의식을 보내서 심장까지 이완해주면 기본적으로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명징성(자각력)은 뇌파가 변형될 때 옵니다. 뇌파를 떨어뜨리고 안정시키는 것 중 호흡법의 일종인 중호흡(양코호흡)법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한쪽 콧구멍만 열려 있지만 양코가 동시에 열려 있을 때에는 의식이 선명하고 명징해집니다. 그러면서 뇌파가 변하고 잡생각이 사라지면서 두뇌 안의 센터들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생각이 툭 떨어집니다. 생각과 의식의 간격이 벌려지는 거지요. 의식이 심장으로 들어오게 되면(귀의하면) 평온함이 유지되다 어느 순간 백회가 열립니다. 백회를 막고 있는 생각들이 떨어지면서 백회와 영안과 심장이 하나의 통로로 일체화되면서 고요하면서 텅비어 있는 상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돌아가고 다시 고요함으로, 이렇게 왔다갔다 하다가 고요한 상태가 더 커지게 되면 나중에는 생각과 무의식까지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생각으로는 이런 상태로 갈 수 없습니다.

도(道)의 맥(脈)은 항상 존재하고 우리의 내면에 늘 흐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생각을 하고 죄를 짓더라도 자아적 측면에서만 근원적 생명의 지혜가 멀고 막혀져 있지 존재 전체 안에는 이것이 항상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괜찮다는 겁니다. 자아는 생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흐름과 멀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존재 안에 우주와 연결된 그 흐름이 변함없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이 진짜 나입니다. 실재의 나는 이것이지만 현상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두뇌가 만들어낸 자아가 일시적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수고 하고 있는 거지요. (중략)


3

우리가 사랑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값진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값진 본질이기 때문에 사랑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형상을 넘어 상대방 속의 근원적 빛과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영원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빛을 만나서 하나가 되도록 하세요. 하나로 녹아드세요. 그러면 알게 됩니다. 삶의 비밀을, 그리고 우주의 비밀마저 당신의 가슴 속에서 뚜렷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울림, 그것이 참사랑입니다. 그러나 욕구나 상처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잃어버립니다. 싸움으로 인해서 상대방의 본질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욕구와 상처를 빼고 보세요. 순수한 열망만으로 우리는 상대방의 본질과 만날 수 있고 상대방의 본질을 만났을 때 그것은 곧 자신의 본질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 그대는 완전한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기억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영원함을 증거해 주는 힘입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예수는 그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러 왔습니다. 에고가 사랑을 만나면 죽게 됩니다. 에고는 그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에고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에고의 욕구와 상처를 비워야 합니다. 그것을 비웠을 때 그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영원성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원성을 깨워줍니다. 단 한 번이라도 참된 사랑을 만난다면 여러분들에게 그 사랑은 영원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 한 순간의 사랑의 발견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영원히 힘든 이 세상을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꼭 그런 사랑을 만날 수 있게 하세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 안에 그것을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눈뜬다면 상대방 속의 빛과 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이것을 봅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형상 너머 상대방 속의 빛과 가능성을 보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가 내게 그랬을 것입니다, 거룩한 이는 온전함을 증거해 주는 자라고. 신은 우리를 부족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신은 우리 가장 내면에 존재하는 에센스를 보아주는 겁니다. 우리는 신의 분신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신이 우리를 봅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에고의 작품일 뿐입니다. 신은 우리 안의 가능성, 에센스를 보아주기 때문에 기독교 성서에서처럼 “보기에 좋았다”라는 표현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엄청난 위대함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를 넘어서 있습니다.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 힘은 빛과 사랑입니다. 눈이 열리면 그것을 알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가되 개인적인 욕구와 상처를 빼고 보면 만날 수 있습니다. 욕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욕구 너머의 차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빼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우주적인 것으로 우리를 지속적으로 키워주는 힘이 됩니다. 실제로 지구가 생명을 키워내는 것도 엄청난 사랑의 힘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키워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주는 거대한 사랑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적 세계 차원을 보면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사랑의 빛이 작용하고 있고, 우리가 형상 너머의 그 세계를 볼 때 우리의 마음에서 갈등과 투쟁이 끝납니다. 형상의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원의 눈을 뜨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고 영원한 우주의 신비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삶은 바로 그런 영원의 눈을 뜬 사람들에게는 천국이고, 뜨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메마른 사막과 같은 세계입니다. 우리가 동시에 그런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세계를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측면에 포커싱하고 어떤 눈을 뜨고 사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유아기를 갓 벗어난 사춘기의 청소년과 같은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전쟁과 갈등, 폭력과 투쟁, 고뇌로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지구적 삶에 간간히 축제가 있고 간간이 휴식이 있습니다. 성자들은 지구가 위대한 신비와 사랑으로 충만한 행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가끔씩 이 세상을 방문합니다. 지혜서와 안내들을 통해 그 문을 열어보여 주지요. 그들은 이 사랑의 역사에 동참하라고 합니다. 일상 공간에서 우리는 사랑 때문에 많은 갈등을 하고 싸우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은 그 어떤 사랑이라도 이 영원한 사랑의 한 반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서 사랑을 느꼈든, 내가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게 사랑을 준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겁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삶은 사막과도 같이 황량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느꼈던 존재들, 나를 사랑했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를 전하세요.

* 위 내용은 한바다님이 진행한 2010년 9월과 10월 메인세션 기간 중의 메시지를 녹취,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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