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2010

마음이 있어야 할 자리(한바다)

명상에 대한 정의는 참 많습니다. 나 역시 명상이란 무엇인가 얘기할 때마다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명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청중]
“명상은 쉬는 것, 자기이해, 그리고 자기치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앎으로써 그 움직임을 그치고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명상입니다.”
“의식을 고요히 하여 의식이 왔던 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위빠사나에서는 명상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는 말은 쉬운데 또 실제로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는데, 어디로 돌아오라는 말입니까? 지금 ‘지금 이 순간’은 ‘지금 이 순간’ 하는 순간 이미 지나가고 없습니다. (농담입니다, 하하.)

명상은 마음이 본래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머물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는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그러나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면 항상 무언가 걸리고 괴롭습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신호인 거지요. 명상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이것을 위한 많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어떤 분이 말한 치유와 자기이해 역시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 중의 현상입니다. 쉬는 것은 마음이 제자리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해도 안 쉬어집니다.

[청중]
“마음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트릭입니다. 깨어서 대답하세요. “마음이 주인입니까, 몸이 주인입니까?” 선가禪家에서의 방법입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라고 물으면 이것인지 저것인지로 정의해야 하죠? 마음이 주인이라고 해도 방망이요, 몸이 주인이라고 해도 방망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그때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한다면 ‘그게 명상이다’라고 할 겁니다. 선사禪師들은 결론은 내려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가의 방식입니다. 스스로 느끼고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스승이 어떤 정의를 내려준다면 여러분들은 그 정의에 매이게 되고 그것을 따라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만나져야 하는데 자꾸 어긋나게 됩니다. 그것이 언어도단言語道斷 현상입니다. 하느님을 글로 적어놓는다 합시다. 그 순간부터 글로 적어놓은 하느님, 또는 예수가 정의한 하느님, 부처가 정의한 하느님이 원래의 하느님을 대신하게 됩니다. 자기가 만난 하느님이 나와줘야 합니다. 자기가 자유로워져야 하고, 자기가 독립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주인이냐 몸이 주인이냐 할 때, 마음도 주인이 아니고 몸도 주인이 아니고, 마음도 몸도 손님입니다. 손님을 한자로 봅시다. 손님 ‘客’은 갓머리(house)에 각기 ‘各’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발과 함께 입(口)이 집으로 온 것을 형상화한 형성글자입니다. 마음은 늘 왔다 갔다 합니다. 다리도 없는 것이 빛의 속도로. (웃음) 몸은 왔다갔다는 안 하는데 입만 들고 있어서 계속 먹여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괴롭힙니다. 몸은 또한 죽을 때 남겨두고 떠납니다. 주인이 아니라는 거죠. 주인은 실제로 안 보입니다. 명상의 목적은 마음도 몸도 주인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겁니다. 이게 제자리에 있는 겁니다. 거꾸로 되면 혼동이 오면서 내가 주인인데 종이 돼 있습니다. 몸에서 불편함이나 아픔이 생겼다, 마음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 누군가가 밉다 이럴 때, 몸과 마음이 주인이라면 ‘저 사람이 밉다’는 것이 사실로 되어 버립니다. 마음이‘저 사람은 분명히 잘못된 놈이야’라고 규정을 지으면 나는 ‘그래 맞아’ 하면서 내 마음이 만들어낸 그것에 끄달리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같이 일할 때 많이 일어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참 좋았더라’에서 ‘원수더라’, 그러다가 헤어지면 외로워지기 시작하면서 ‘그때가 좋았다, 그립다’로 됩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나’ 하고 자학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것이 마음의 속성일 뿐입니다. 객客이 그러고 있습니다.

명상의 목적이 고귀한 것은 주인이 무엇인지 바로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걸쳐 손님 접대만 하다 끝나면 어떻겠습니까? 자신도 모르고 결국 귀신 섬기면서 산 셈이니 얼마나 허탈하겠어요? 마음이 제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은 마음과 몸이 나의 주체(본질)가 아니라 내가 쓰는 용用이 되고 진정한 나(본질, 본체)가 주인이 된다는 겁니다. 명상은 근본적인 나를 찾는 것인데, 근본적인 나(體)가 따로 있더라는 겁니다. 몸과 마음은 내가 삶을 운영하기 위해서 우주로부터 빌려온 하나의 필요도구일 뿐이더라는 겁니다. 살(土)도 혈액(水)도 빌려온 것입니다. 빌려온 것이니 죽을 때 돌려주는 것이지요. 살아 있는 동안 몸을 잘 보살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겁니다. 몸이야 죽으면 놓고 가지만 마음은 죽고 나서도 따라다닙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마치 로켓이 발사되듯이 육체를 벗어납니다. 육체를 벗어나면 참 편하고 좋은데, 조금 있다 보면 너덜거리는 다른 몸이 또 있습니다. 소멸되지 않은 마음이 붙어 있는 거지요.

명상의 목적은 가장 본질적인 몸과 마음의 근원을 아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명상은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 맞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주인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주인의 자리를 찾으면 몸과 마음이 빛이 납니다. 그렇지 못하면 불안한 몸과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주인의 자리를 찾으면 자유로워지면서 밝아집니다. 그 주인의 자리가 바로 진리와 하나 되는 자리입니다. 우리 내부에 진리와 하나 되는 자리(우리에게 그런 인자因子가 존재합니다)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그 자리를 찾아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마음은 100%의 주인이 아니고, 거기에 정보가 들어가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생각이 멎은 자리에 진짜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생각이 객이고, 생각이 멎은 자리에 주인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늘 ‘天’ 자는 큰 ‘大’(사람), 몸과 마음이 본체(一, 몸과 마음의 주인인 자리)와 교류하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정수리로 몸과 마음이 하나 된 자리의 기운이 들어오는데, 마음이 이 자리에 포커싱돼 있을 때는 괴로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한 어리석지 않고 밝습니다. 마음이 이 자리를 이탈해 돌아다닐 때는 그때부터 흙탕물을 일으킵니다. (중략)

우리의 의식체 안에는 무형의 마음이라는 창고(디렉토리)가 있는데 이 안에 수많은 정보들(정보망)이 들어가 있습니다. 나라는 의식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매우 정교한 우주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 자체는 마치 인터넷망과 같은 기억(정보)의 바다입니다. 자신이 느꼈거나 경험했던 모든 것이 기록이 돼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고도로 압축된 정보의 파일입니다. 우리 몸의 유전자 안에는 공룡시대 기억까지 담겨 있습니다. 심지어는 원자, 분자 시절의 기억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이런 기억입니다. 이 기억과 기억끼리 서로 충돌하는 것이 갈등이고 기억과 기억 간에 모순이 없으면 평화로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를 경우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기억들이 나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기억이 나라고 붙잡고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안다고 할 때, 그 앎의 과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각(sensation)적인앎(perception)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인지認知(recognition)적 앎이죠.] 그 정보에는 먼저 나의 개체적인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부모의 기억, 조상의 기억, 전생의 기억, 미래의 기억(미래에 올 파동을 미리 기록해 놓은 것, 예지豫言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 기억들이라는 것이 앞에서 말했듯이 어릴 때 상처받은 경험의 기억(나의 업), 부모의 기억, 어릴 때는 몸이 유연한데 그때 흡수되어 차크라에 기록된 부모의 기억(부모의 습관까지 배어듦), 그리고 조상의 기억(조상의 업, 원거리에서 파이프로 연결된 에너지로 이유도 모르고 괴로움에 휩싸일 때가 있음), 또 상처의 기억도 없는데 괴로운 경우, 나의 에너지장 안에 뭉쳐져 있는 전생의 입자 때문일 경우가 많은데 그 전생의 업,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렇게 해서 괴로움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쓰고 냈던 마음들이 없어지지 않고 전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몸과 마음의 수많은 정보들을 바로잡아서 혼란스런 파동이 아닌 상태, 스스로 조화로운 상태로 균형을 맞추고, 내가 그 방대한 세계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된 자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제자리로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이나 감정을 초월해야 합니다.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을 전부 부정해버리는 방법입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따라가지 않고 무시하고 놔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극도의 고통이 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묶여 있던 어떤 것이 툭 떨어져 나가면서 변형이 일어납니다. 나의 의식이 마음에서 마음이 아닌 자리로 이동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해방된 체험을 공空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깨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깨친 거지요. 이렇듯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가는 이 방법은 마음을 뚫고 지나가는 정공법입니다. 이것을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이것이 결국 마음공부입니다. 이 길은 설명으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이나 욕망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것이 내가 아님을 알고 초연하게 그것들을 바라봄으로써 에고적 힘이 약화되면서 제자리로 가버려요. 그 중간에는 엄청난 괴로움이 옵니다. 원래 있었던 것이 올라오는 거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툭 떨어져나갈 때 자유로움을 맛봅니다. 이것을 ‘한 번 보았다’, ‘초견성했다’ 합니다. 의식이 있다고 할 때의 의식은 일반적인 의식이 아니고 자각하는 의식, 깨어 있는 의식을 말합니다. ‘의식이 깨어 있다’ 함은 생각이나 감정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의 의식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의식이 명상으로 갈 때 본질로 가는 겁니다. 해방이 일어나는 거죠. 깨어 있지 못하다는 것은 내가 생각이나 감정에 빠져 있다는 것, 생각이나 감정에 딱 붙어(동일시되어) 그것이 옳다고 전적으로 믿고 끌려다니고 있는 의식상태를 말합니다. 그때의 그 사람은 꿈 속에 있는 겁니다. 꿈 속에 있으면 내내 두들겨 맞습니다. 바깥에서 괴롭혀준 사람이 나타나는 거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질 때 바깥사람에게 원망을 투사합니다. 사실은 그게 착각입니다. 여러분들은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온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 모든 사람은 나의 거울이자 나를 일깨우기 위한 스승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이 공부를 하는 길에서 두 종류의 스승이 있는데, 한 스승은 온전한 길로 안내해 주고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스승이 있습니다. 또 다른 스승은 자신을 괴롭혀주는 스승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깨치기 위해서는 두 스승이 다 필요합니다. 나 같은 스승은 여러분을 보호해주지만, 여러분들이 고도로 정밀하게 준비돼 있지 않으면 깨치게 해주지 않습니다. 그 전에 깨치게 해주려고 하면 여러분들과 나는 원수가 됩니다. 나는 여러분 안에 있는 적敵을 끄집어내야 되거든. 그게 바로 탄트릭 마스터의 원래적 역할입니다, 섹스 탄트릭이 아니라. 탄트릭 마스터는 여러분 안에 있는 에고 덩어리(원수)를 끄집어내 주는 마스터입니다. 지금은 바깥에 너무 많은 스승들이 있으므로 스승들이 이것을 잘 안 하죠. 바깥에서 괴롭혀주는 스승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까지 그러면 여러분들이 갈 자리가 없잖아. 그래서 나는 그 역할을 안 합니다. 여러분들의 때가 되면 여러분들을 엄청나게 괴롭히는 스승이 나타나 아주 심하게 여러분들의 에고를 건드려 줍니다. 여러분들의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들의 의식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때 이 공식을 알면 버팁니다. 공식을 모르고 있으면 ‘네가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어, 그러고도 친구야?’ 하고 흥분하여 욕설도 해대고 할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이 공식을 알고 있으면 공부가 됩니다. 아무튼 어느 누군가가 여러분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서 은총을 베푼다면 그때 여러분들은 그 바깥의 대상의 행위와 말과는 상관없이 단지 움직이는 그대의 마음만 보면 됩니다. 이것이 자각입니다. 자각이 뭐라고 했습니까? 첫째 자각은 생각이나 감정에 내가 휩쓸리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 자각을 놓치잖아요? 그때 다시 나를 돌이켜보는 것, 이것이 회광반조, 또 다른 자각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격이 성숙됩니다. 인격의 성숙은 결과적으로 대조화와 화합으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깨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얻을 결론은 풍요와 행복의 추수입니다.

내가 왜 주인이 돼야 합니까? 주인(主)이 된다는 것은, 손님(客)이 든 집에 내가(眞我) 자각의 불꽃(자각의 빛)으로 안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여자들은 비녀를 꽂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일제 식민지 시절 단발령에 반대한 많은 유림들이 왜 그리 목숨 걸고 반대했을까요? 상투는 어른이 되면서부터 틀기 시작하는데, 상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상징적 표식으로서 바로, 주인된 자리, 본질의 자리와 연결된 표식이었습니다. 상투를 정수리에 트는 것은 백회로 내려오는 하느님과의 소통하는 자리, 내가 근원적인 주인과 연결되어 내가 주인이자 동시에 종이면서 진리와 소통하는 자리, 그 자리를 상기하고 인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전통은 우리 민족이 상고시대로부터 간직해온 영적, 정신적 표식인데 그것을 잘라버리라고 하니 그리 반대를 했던 겁니다. 상투의 뜻은 뭡니까? 불꽃, 즉 진리와 하나 되게 하는 힘이면서 생명의 빛, 자각의 빛입니다. 그 자각의 불꽃을 갖고 살라는 뜻에서 상투를 틀었던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른은 ‘자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나의 스승으로 삼으면서 나로 돌이킬 때, 내가 주인된 자리로 돌아가고자 강력하게 염원하고 발심할 때, 우리의 상투끈(하늘과 연결되는 안테나)으로부터 오는 중심의 기운이 교교하게 살아납니다. 살아나면서 내가 고통스럽고 문제 삼았던 것, 미워했던 대상이 순간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상태로 전환이 돼버립니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내가 현재 고통스럽고 누군가가 밉다면 그 상태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내 자리에 있지 않구나, 내가 자각의 불꽃을 세우지 않고 있구나’ 하는 표시일 따름입니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자학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내가 그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강하게 발심하면 됩니다. 그런 순간에 존재 중심의 힘이 깨어나면서 어느 순간에 ‘이거 아무 것도 아니잖아’ 하게 됩니다. 즉, 꿈이었구나 하는 것을 절절하게 알게 되는 거죠. 우리가 깨칠 수 있는 것은 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인 주主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뜻을 알고 명상을 합시다.

이 내용은 2010년 1월 메인세션에서 한바다님이 행하신 강의를 녹취,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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