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2010

<삶과 명상>이 만난 사람들 -한 바다편 (1)

이 글은 어쩌면 인터뷰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몰랐던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은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일지 모른다. 여러 사정이 있었다.

원래 한바다님과의 인터뷰는 당초에 계획에 없었던 것이다.



9월호 테마 기획을 위한 적당한 필자를 찾다가 일단 원고 청탁 차원에서 한바다님과 접촉을 해보기로 했었다. 어느 일요일 오전 마악 금강산 방문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한 한바다님을 강남 모처에서 만났으나 ‘생각이 끊어져 있는 상태’가 많으므로 본인이 직접 글을 쓰기는 곤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해서 주제에 관련한 질의응답을 녹음해 필자가 글로 재구성하기로 하고 다시 한바다님의 거처가 있는 계룡산 자락을 방문하기로 했다. 다시 찾아온 필자를 한바다님과 제자 한 분이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기 좋고 물 좋고- 계룡산의 청명한 기운을 듬뿍 느껴보며 맛있는 점심을 함께 한 후 인터뷰가 시작되었는데 테마 기획과는 별도로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문제는 일찍부터 제자들을 지도해 온데다 명상수행계에 적지 아니 알려져 있는 한바다님에 대하여 필자가 그다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필자의 준비 부족에도 원인이 있었지만(사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생각도 안 해 보고 그저 멍청한 상태로 내려갔으니까) 나중에 부근의 한 민속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술까지 한 잔 마시면서 진행된 대담의 녹음 기록을 들어보니 필자 쪽에서 나온 갖가지 오만불손, 극언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이게 인터뷰를 하러 온 사람인지 뭔지 한마디로 “정말 성질 더럽다”였다.



그렇게라도 하니 필자로선 건지는 바가 많았다. <난데없는 봉변>에 가까울 수도 있었던 인터뷰 내내 필자에 대한 이해심과 사랑을 가지고 응해주신 한바다님께 감사를 드린다. 물론 이와 같은 정황들을 세세히 기록할 수는 없었지만 독자들이 당시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읽는다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존칭이나 경어를 가급적 생략한 것은 독자들이 그러한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또 테마 기획 부분을 제외한 인터뷰 내용을 게재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위에선 반대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것은 공인으로서의 한바다님에 대한 선입관이나 편견이 꽤 존재한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바다님과의 인터뷰 내용을 모두 게재하기로 한 것은 어쨌든 뜻하지 않는 상황을 선호하는 필자의 취향도 있는데다 내적인 문제와 관련해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판단은 독자 개인의 몫이며 필자 역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렸했음을 밝혀둔다. 인터뷰는 총 4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 성과 명상(9월호 참조)

2. 명상

3. 한바다의 영적 여정과 대내외적 활동

4. 자유 방담 및 개인적인 질의 응답.

이번 호에는 ‘2.명상’과 관련한 내용을 다음 호에는 ‘3,4’항과 관련한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부디 즐겁게 읽어 주시길.







윤: 오랜 수행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전체적인 지성은 아주 평범하거나 오히려 더 편협해 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반면 명상 관련 지식도 많고 소위 열린 의식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수행 자체는 별다른 진전이 없이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초보자들은 특히 지성이나 명상 어느 것도 성숙한 상태가 아닌 이상 명상 수행의 길로 들어설 때부터 많은 혼란을 겪게 된다. 바르게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한: 이성적이란 통제를 의미하는데 그럼에도 당연히 이성적인 능력이 먼저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법이 따라가야 옳다. 수행의 길에서는 성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유혹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닥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들을 올바르게 헤쳐가기 위해서는 이성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윤: 너무 일반적인 얘기인 것 같은데...?




한: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수행의 실질적인 완성은 개개인이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수행자들에게 환정보뇌(還精補腦)의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성 에너지가 먼저 열린다면 그것만으로는 에너지가 제대로 상승하기가 곤란하다. 성 에너지가 먼저 열리는 것보다는 성이 (이성에) 포함되는 상태에서 열리는 것이 옳다. 순서가 바뀌면 에너지가 모이지 않는다.




윤: 한국적인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답을 줄 수 없는가?




한: 당신이 먼저 구체적인 질문을 해달라.




윤: 한국인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에 고유한 왜곡된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이고 당연히 심리적으로도 상당히 왜곡된 상태에서 명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한국인을 위해서 얘기해 달라.




한: 한국인이든 아니든 먼저 자신의 마음의 왜곡된 구조를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수행이란 몸을 빌어서 하는 것인 만큼 자기 몸과 마음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서양에도 성경 같은 책을 보면 성에 관한 미묘한 상처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여자들은 단순히 ‘여자’라는 말만 들어도 자궁이 아파오는 여자들도 많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여자들에 대한 억압이 심해 그로 인한 상처가 그네들의 기저 체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수행을 하고 싶어 하는 한국 여자들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대부분 하트가 발달되어 있다. 세상을 도우려는 자비심도 많다. 그런데 자꾸 머리가 아프다거나 겉보기엔 어느 모로 건강한 신체인데도 의외로 힘이 없는 여자들이 있다. 그녀의 성문제가 어디선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성과 관련해 특별히 문제가 되는 사건도 없었다고 하지만 그만큼 성에 관한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그 기억들을 밀어내려다보니 머리가 아프다거나 이상적인 배우자와 결혼을 해도 성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진다거나 그 무의식의 저항 때문에 자기 에너지 전체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수행에 대한 갈망, 그리고 일견 그에 적합해 보이는 배우자나 환경, 기회를 만났어도 밑에서는 힘이 받쳐주지 않는 것이다.




윤: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한: 첫번째는 자신이 먼저 자기의 상처를 직시하고 감싸주어야 한다. 상처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앞에 놓인 잔을 가르키며) 이 잔을 보는 방법은 잔만 보는 방법이 있지만 그 주변 전체 속에서 잔이 놓여 있으며 잔의 역할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되지 않나? 그것이 잔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못 생긴 잔이네 금이 간 잔이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이것은 누군가는 물을 따라 마시고 누군가는 차를 따라 마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사랑을 보내야 한다.

여자분들에게는 충격적인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치유단계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가슴 에너지는 발달했지만 성이 꽉 막혀 있어서 유폐된 상처를 가진 여자들이 있다. 만약 이런 여자들이 성센터가 열리고 가슴 에너지도 더 열리는 쪽으로 점점 변화해가면 얼마 동안은 자궁에서 엄청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민감한 사람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성 센터가 동결되면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다. 위와 아래가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힘이 항상 없다. 은폐된 진실은 본인이 말하기도 꺼려하고 자기 자신이 뭔지도 모른 경우가 허다하다. 이해하기 위해선 저항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막혀 있던 상처가 풀려나가면 그때까지 은폐되었던 상처로부터 굉장히 강렬한 냄새를 동반한다.




윤: 나한테는 어떤 냄새가 나나?(좌중 폭소)




한: 그런 대로 괜찮다.




윤: 하지만 나도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다시 웃음)




한: 에너지는 명상을 통해 집중되어야 하는데 대부분 자기 안의 왜곡된 문제로 인해 겉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점은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왜곡된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게 되면 에너지가 풀리면서 점차 강렬해지는데 그러면 물라다라 센터의 섹스 에너지는 엄청난 에너지가 되어 신장을 열면서 척추를 따라 위로 상승한다. 그렇게 하여 외부적 충격이나 스스로 만든 동결 상태에서 풀려나가는데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 진리에 대한 열망은 별개의 것이다.




윤: 무슨 뜻인가?




한: 다시 말해 강렬한 구도 정신으로 아무리 열심히 수행을 해도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밑이 살아나 위와 연결되어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잘 흘러야 한다.




윤: 스님들처럼 독신 상태에서 대각을 구하는 경우도 많다. 성을 배제한 깨달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모든 대각에는 반드시 성 에너지가 포함된다. 성 에너지란 생명 에너지이고 모성애이며 이것이 쿤달리니 에너지이고 쿤달리니 에너지란 지구를 떠받치는 힘이다.




윤: 문명이 발달했다 하지만 인류의 전반적인 의식은 그다지 높아진 것 같지 않다. 성도 많이 개방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예전보다 더 쾌락주의적이 되고 그로 인해 어떤 이들은 더 커져버린 성적 자극과 욕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어떻게 해야 진화할 수 있는가?




한: 인류는 희생자 의식에서 자기경험의 주인의식으로 변해야 한다.

그 동안 힘이 없어 당했다-이런 희생자 의식이 강하다. 실은 힘이 없는 게 아니다.

힘이 있어야 희생당할 무엇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간의 과거가 이러저러했다는 걸 문제시할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떤 과거였든 지금 주인의식이 되어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윤: 여자들의 성을 억압함으로써 남자들 자신도 왜곡되고 억압되었다. 어떻게 보는가?




한: 성이 왜곡되고 억압되었다고 하는데 억압은 상처가 아니다.(이 점에 대해선 9월호 한바다님의 글을 참조하라) 성적 억압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는 우리들 각자가 자신들에게 일상적으로 심리학적 처벌을 가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성기를 갖고 놀던 어린 아이가 자라나면서 몽정을 겪게 되면 단순한 생리적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죄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처벌한다. 수행자들 역시도 그렇다. 예컨대 선도를 수행하는 사람이 몽정이나 유정을 하거나 강렬한 성적 욕구에 부딪치면 자신이 무언가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으며 자신의 수행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허탈감과 가책감에 빠진다. 그런 것은 자기 것이 아니다. 억압한 자의 가해 의식이든 억압받은 자의 피해의식이든 따지고 보면 양자 모두 희생자 의식이며 자기 것이 아니다.




윤: 명상 수행인들에 있어서의 성 에너지의 억압은 어떻게 보는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한: 성 에너지를 활성화하고 승화시키기 위해 억압을 가한다는 것인데 그런 것이 쿤달리니 요가 같은 것의 단점이기도 하다.




윤: 구체적으로는?




한: 남자와 여자는 차이점이 있는데 같은 방식을 적용한다는 게 문제다.

여자는 첨서부터 하트가 열린 상태이다. 성 에너지를 활성화시켜 그곳으로 흡수해야 한다.

남자는 단전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활성화된 성 에너지를 보존해서 하트 부위로 올라가야 한다. 가슴 아래 센터가 모두 연결되어 에너지가 흘러야만 환정보뇌를 할 수 있다. 아무리 위, 골대, 결과만 잡고 있어봐야 의지로는 환정보뇌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성 에너지의 승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윤: 일반적으로 쿤달리니 에너지의 상승은 아래로부터 위로 열려 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트는 단전보다 위에 있는 에너지 센터 아닌가? 위에는 열렸는데 아래는 막혔다는 것이 가능한 얘기인가? 완전히 열려 있다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열려 있다는 뜻인가?




한: 물론 그렇다.




윤: 당신은 구체적으로 사람마다 그것을 분간해낼 수 있는가?




한: 그렇다. 여러 가지 표시가 있지만 두 센터의 진동율은 다르다. 나로선 각 센터에서 나오는 진동을 느낄 수가 있다.




윤: 나는 어떤가?

(한바다님의 답변에 필자가 몇 가지 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우기는 통에 얘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짐)




윤: 오쇼 같은 이는 전생의 수행 에너지에 대해 말한 바 있었다.

예컨대 하타 요가처럼 육체 중심의 수행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그 생에서의 성취는 다 사라진다고 한다. 반면 에텔체나 아스트랄체 등등 미세체 차원의 수행 에너지는 그 생에서의 성취만큼 보존되었다가 다음 생에로 이월된다고 하는데?




한: 쿤달리니 에너지 체계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저마다 다르다. 육체 레벨의 쿤달리니도 있고 에텔체 레벨의 쿤달리니도 있다. 다른 레벨의 쿤달리니도 있다. 육체적 현상도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잠재의식이 모두 떨어져 나간 경우에는 고피 크리쉬나나 다른 사람의 책에서 보는 바와 같은 폭발이 없다. 심리적 저항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레벨이든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의 저항을 해소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윤: 다른 각도에서 물어보겠다.

어떤 책을 보니 일반적인 요가나 기공은 육체 차원의 수련, 선도 에너지 체계는 에텔체적인 현상이고, 쿤달리니 요가는 아스트랄체와 관련되며 크리야 요가는 멘탈체와 관련된다 -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다. 반면 오쇼는 이와는 다른 주장을 하고, 또 다른 이는 선도나 기공 체계를 탄트라 체계의 현상이나 용어와 동일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수행자들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아주 다른 진단을 내리게 되고 그리하여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 맞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윤: 그래서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서 소설가가 되기 쉽다.

자신의 수행 체계에는 적용되지 않는 다른 체계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성취 정도를 자신에게 강요하고 허구를 창조해 내기 때문이다.




한: 그렇다. 그런 식으로 몸을 망치거나 병이 생기는 사람이 많다.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핵심은 어떤 명상법을 통하든 지식을 통해 수행한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식이란 단지 참조사항일 뿐이다. 현재의 자기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지식을 통한 이해의 체계는 인도든 한국이든 불가든 요가이든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첫 번째는 자기가 자기 스스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머진 다 자기 믿음이다. 자기 마음을 이해하기 전에는 아무리 수행에 집중을 해도 에너지는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마음법(관법. 심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음법을 통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기 쉽다.




윤:관(觀)한다는 그 마음 자체도 대부분 신뢰하기 어렵다. 우리 마음은 몸과 욕망에 철저히 구속당해 있지 않은가?



한: 당연히 마음은 몸에 영향을 받고 결부되어 있다. 관법이란 그런저런 제 마음의 상태를 주시하는 것이다.




윤: 그 관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그저 사념체가 아닌가? 몸이나 욕망, 그것이 만들어낸 사념체와는 별개의 마음이 있는가? 몸이 마음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보라.




한: 당신은 말하자면 물건이란 개념을 가지고 물건을 인식하는 것뿐이다. 물건이 물건을 인식할 수 있겠나?




윤: 자신이 마음을 주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불과할 수도 있다. 일종의 강요된 감각의 유희가 아닌가?


한: 마음의 유희가 마지막이다. 그것은 지켜보는 자가 부분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라져야 한다. 명상을 하면서 지켜본다, 지켜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만 아프다. 진짜 주시는 전체가 되어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지켜봐지는 것이다.

지켜봄에는 수준이 모두 다르고 그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사람들은 주시를 하다가도 대개 피곤해서 중도에 집어치운다. 한계에 오면 도망가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하다. 전체적인 이해를 하기란 정말 힘들다. 대부분 머리로 판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윤: 나로선 잘 모르겠다.




한: 백 프로 모르면 호기심이 있어 진행이 되겠지만 당신 같은 경우엔 나름대로 체험이 있어서 물어보기 때문에 나로선 당신이 질문하는 요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




윤: 그러고 보니 다 내 문제인 것 같다.

다시 아까의 얘기로 돌아가면 명상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명상 이론 체계는 한 사람의 수행과 성장에 실제적인 도움을 줘야하는데 저마다 각각이고 많은 부작용이 있다. 명상 이론 이나 용어들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하지 않나?




한: 그것은 맞다. 개념 정리란 혼돈을 정리하는 것이고 그것이 실용성이다.

그런데 내가 정작 말하고자 하는 실용성은 이렇다.

기공이나 단전 호흡. 쿤달리니든 모든 명상법들은 일정한 작용들이 있고 그것들은 각 문화나 기후에 따라서 다른 해석과 다른 적용을 받게 된다. 그런 것들을 일일이 묻고 캐기보다는 기공은 뭐에는 확실히 좋고 요가는 뭐에는 확실히 좋고 차크라 체계는 뭐에는 확실히 좋고,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윤: 서양은 물론 이웃 대만이나 일본, 우리나라만 하더라고 명상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과학적으로 접근해 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선생들은 걸핏하면 네 마음 자리를 보아라 - 그렇게 말한다. 맞는 얘기이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현대인의 마인드를 설득할 수 있겠나? 명상과 과학은 만나야 되지 않나?







한: 과학에도 한계는 있다. 검중할 수 있는 데이터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한계가 있다. 임상 데이터라는 것도 검증할 수 있는 전기 신호에 의존한다. 그것이 어떻게 정확할 수 있는가?




윤: 임상실험만이 아니고 여러 수행법을 몸소 해보면서 검증해가는 자기 실험도 있다. 나는 자주 삼맥칠륜, 그러니까 차크라 에너지 체계와 임독 양맥이나 기경팔맥 등 기공이나 도가의 에너지 체계를 똑같이 취급하는 선생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그 수행법들을 모두 체험해 본 어떤 대수행자에 따르면 그것들은 각기 다르다고 한다. 그는 그러한 기의 순환 체계에 대해 부분부분 세밀한 도표까지 제시하면서 그 차이점을 설명한 바 있었다.

오쇼만 하더라도 인간에겐 육체라는 조대신을 포함해 7개의 신체가 있고 그에 따른 수행체계와 에너지 체계가 다르다고 했다. 예컨대 쿤달리니는 에텔체와 관계되지만 선가 수행은 성기체(아스트랄체)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에텔체는 육체와 가장 근접한 미세신이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자기의 과정을 알 수 있지만 성기체는 그 너머너머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느 지점에 왔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보통 에텔체 수행자가 선방 수도승처럼 닭울음 소리에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하는 경우가 없는 것도 그러고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첫단추를 잘 꿰야 되지 않겠나? 무책임한 선생들이나 이론가 때문에 혼란이 많다.




한: 원래 헷갈리게 되어 잇다. 어떤 것도 결국은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실험적으로 대신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어떤 것을 진리라고 알면 안 된다. 어떤 것도 다 방편 아닌가?




윤: 동의한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이런 혼란 때문에 명상인들이 너무나 자주 자기 상태에 대해서 픽션을 쓰기 쉽고 불필요한 과정에 휘말리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명확히 해 두는 게 필요하지 않나?




이때 배석했던 김철호 편집 위원이 이의를 제기했다.




김:나로선 그런 것들이 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 것을 아는 게 무슨 도움이 되나?




한: 내 입장은 어디까지나 실용적이다. 어떤 레벨에서 도움이 되는가? 모든 수련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그것을 취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머리 위는 깨쳐야 하고 가슴은 열어야 하며 그 밑으로는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그 방법은 무엇인가?




한: 가슴 밑의 에너지 센터가 열리면 생명 에너지의 파이프 라인이 커진다. 그런데 에너지대가 커진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결국은 무얼 하겠나? 바람을 피운다든지 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조정하려 한다든지 돈, 명예, 여자... 환정보뇌가 되기도 전에 에너지가 다 잡아먹힌다. 단순히 에너지가 커진다면 이런 것은 선가든 불가든 어디든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제삼의 눈을 연다든지 하는 식으로 위만 열려 한다면 나중에는 막혀 있는 밑의 에너지들에 끄달리게 되어 있다. 밑의 에너지 센터들은 치유해야 한다. 일상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것,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는 것도 그 방법이다. 결혼할 사람이 안하면 병들게 마련이다.

치유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이해가 중요하다. 에너지는 흘러야 한다. 그것을 나는 지금 이렇다 저렇다 규정하면 할수록 더 막힐 뿐이다.

머리는 깨치고 가슴은 열어야 하며 그 밑으로는 치유해야 한다. 이것이 어떤 에너지체와 관계된 수행을 하던지 그와는 상관없이 내가 가진 결론이다.




윤: 가슴의 상처들을 이해하고 알 수는 있어도 그 밑의 상처들은 스스로 인식하기는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그것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는가?




한: 맞는 말이다. 그 밑의 상처들은 무의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의식화시켜야 한다.




윤: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한: 당신도 마찬가지만 어떤 사람이 가슴에 상처가 많다면 그것은 가슴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가슴이 열려 있기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은 가슴에 받는 상처들에 대해 민감하게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마니푸라 센터 이하 단전 그 밑의 에너지 센터와는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니푸라 센터가 열려야 이 우주의 깊은 에너지가 들어와 활성화된다. 마니푸라 센터가 긴장되어 있으면 그 밑으로 에너지가 내려가는 것이 방해받는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겉으로는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보이면서도 실은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남자들이 연애를 할 때 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서로 깊은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라도 상대방은 미세하게 그것을, 그 긴장을 느낄 것이다. 본인은 무척 개방적이고 관대하지만 여자들은 깊은 곳에서 자신이 상대방에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것이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깊은 충격으로 작용할 것이다. 자유롭게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래저래 헤어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마니푸라가 긴장되어 있다면 설령 그가 하트가 열려있는 사람이라도 상대방에게 푸근한 느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윤: 마니푸라의 상처는 어떻게 생기나?




한: 대부분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혹은 그가 자궁 속에 있을 때 받은 무의식과도 상관이 있다. 스스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서 온다. 그것이 그를 배꼽 아래와 연결시키지 못한다. 부모가 자신을 배신을 했다거나 해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면 내적으로 불안해지고 에너지는 응고되며 그 부위에는 긴장이 생긴다. 대인 관계에서 돌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고 엄마를 폭행하고 그렇게 되면 본인은 절대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데 그게 심해지면 여자를 만나도 성관계를 못할 정도가 된다. 그러한 긴장 때문에 상대방도도 따로 놀기 시작하면 본인 역시도 결국은 아버지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된다. 자궁 안에 있을 때 혹은 어린 시절 부모와 자기 사이의 긴장이 있어서 스스로가 용납을 못하게 되고 이것이 잠재 의식에 기계적인 습관으로 남게 된다.




윤: 이성 관계나 다른 인간 관계가 깨졌다든지 껄끄럽게 되었을 때는 그 이외에도 여러 반응이 있을 수 있는데?




한: 상대방에게 어떤 방식의 감정적 대응을 하든, 단순히 잠시 화가 났을 뿐이라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이해는 하면서도 상대방이 우습게 여겨진다거나 측은하기까지 한다든지 결과는 다 받아들여도 과정상 옳지 않았다든지, 모든 것은 마니푸라 센터의 긴장이다.

결국은 모든 작용이 내 안에 있는 에너지 현상이다. 어떤 부정적인 감정들도 결국은 내 안에 있는 에너지 현상이며 수행자들은 그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 밑의 센터들에 치유가 일어나고 가슴은 열리며 그렇게 해서 위를 깨우치게 된다.

(한바다님과의 인터뷰 전반부 끝. 정리 =윤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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