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2010

치유와 통합, 그리고 관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개의 나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고통의 문제, 최고의 문제는 누가 나를 때려서, 누가 나를 버리고 도망가서, 내가 망해서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분열돼 있기 때문에 내가 좋다고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후회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하려고 하는데 또 다른 나가 이런 나를 반대하며 거스리게 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릅니다. 때문에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싶더라도 관계 속에서 어떤 나가 진정한 나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통합돼 있을 때 내가 전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통합이 될 때 거기에서 나의 온전한 행복이 꽃피어 나고, 말에도 일관성이 있게 됩니다. 먼저 나 자신을 통합해야 다른 사람과도 온전한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을 때 3가지로 분열돼 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와 못난 나, 또 하나는 되고 싶은 나(내가 바라는 나)입니다. 이것을 통합하는 것은 자각하는 힘입니다. 자각하는 힘이 이 3가지를 통합해서 통합이 되어야 합니다. 아래 내용은 한바다님이 2009년 5월에 서울에서 행하신 <삶의 CEO되기>에서 진행하신 세션과정을 녹취.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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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피타오 세션(해피타오 메인세션)을 1995년부터 14년간 진행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횟수의 세션을 진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해피타오 세션을 만들어 낼 때, 인류사적 비전을 보고, 인류의 마인드를 바꿔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당시 내게 는 계속해서 미래사회 비전이 보여졌고, 현재에도 중요한 터닝포인트(turning pont)마다 인간집단의 무의식적 흐름이 보입니다. 그 집단의식의 흐름을 조절하는 역할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공상과학자처럼 인식될 수도 있는데, 내게는 사실입니다. 내가 인간의식의 맨 밑바닥까지 닿아 인간 집단의식의 흐름을 느끼고 있습니다. 인류의 집단의식이 마치 어항의 물고기들이 노는 것 보듯이 보입니다. 인간의 집단의식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해피타오 세션을 통해 인간 개개인의 마음들의 밑바닥 구조를 바꾸는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해피타오 세션에서 원래 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의식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위해 두 가지 차원이 변형되어야 하는데, 먼저는 마인드, 그리고 행동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마인드적으로 가는게 마음공부이고 행동으로 하는 게 까르마요가의 길입니다. 두 가지를 같이 해야만이 성공적인 인생이 가능합니다. 변형의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가 치유(까르마 소멸)와 통합입니다. 인류가 전체적으로 의식의 진화를 이루고 지구상에 새로운 빛의 문명이 펼쳐지기 위해서도 전인류사적인 힐링, 개체의 통합, 존재와 존재와의 통합이 요청됩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과 존재의 변형을 위한 결정적 열쇠- 자기치유와 통합에 대한 내용에 대해 얘기를 나누겠습니다.

신념체계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무의식의 상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과거의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고, 과거의 경험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감정과 아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이 신념입니다. 신념체계는 하나의 판단과 결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삶을 살아갈 때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우리 자신이 자율적인 판단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의식에 내장된 프로그래밍 패턴(밑프로그램 혹은 밑구조)이 그것입니다. 위기의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이 나와 일을 그르쳐버립니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 감정의 에너지들은 계속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감정은 강력한 마그넷(magnet), 자석입니다. 감정은 심리적 자석입니다. 강렬한 감정은 그 상황을 끌어옵니다. 이 마그넷은 소멸될 수 있습니다. 보통 이것은 소멸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 힘들면 ‘이 세상은 힘든 거야, 우울하고 어려운 것야’하고 결정해 버립니다. 한편으로 감정은 바깥세상을 해석하는 틀이 됩니다. 내가 슬프면 세상이 슬픕니다. 내가 웃으면 세상이 웃는 것 같습니다. 나에 의해 세상은 계속 바뀝니다.

명상한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과정들을 이해하고, 이 과정에서 내가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명상입니다. 나아가서 이것을 해결함으로 해서(이용해서) 삶을 더 잘살수 있도록 재설계할 수 있습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써서 내가 경험한 구조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지는 하나의 결심입니다. 신념체계와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이 강하게 결정화될 때, 의지가 됩니다. 생각이나 감정은 바뀔 수 있는데, 이것이 안바뀌는 것처럼 인식될 만큼 강력한 자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내 삶이 어려워지는 겁니다. 세상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강렬한 감정의 에너지가 내 무의식층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똑같은 경험이 오고, 또 오고 하면서 부정적인 자신의 것을 계속 보게 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이게 드러날 때는 와이프하고도 싸우고, 남편하고도 싸우고, 나중에는 친구와도 싸우게 됩니다. 이 구조를 알면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이 때, 감정은 없어지는데 신념체계는 안 없어집니다. 그런데 감정이나 아픔이나 신념체계는 결합이 돼 있습니다. 내가 배가 아프다고 합시다. 아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픈 사람이 되어 그것을 보호하려고 보호막을 칩니다. 내가 아픈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모든 것이 아픈 것처럼 투사가 되겠지요? 육체적 아픔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정서적 아픔이 있을 때도 똑같은 태도가 나옵니다. 실제 아픔이라는 것은 크지 않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아픔은 아주 작은데 그 아픔을 증폭시키는 기제가 또 있습니다. 이 기제가 감정과 결합되어 ‘나는 이런 존재이다’는 아이덴티티를 또 만들어 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는 판단을 하고,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소극적으로 움직여야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아픈 사람으로 살게됩니다. 이게 습관화되면 어떻게 되면 하면, 내가 불안할 때마다 아픕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일을 해야하는데 아침에 갑자기 아픈거야. 그래 가지고 애인에게 빨리 오라고 전화합니다. 가보면 하나도 안아파요. 그런데 표층에는 실제의 아픔이 만들어집니다. 병원에 가면 없는데 지는 아픕니다. 여러분의 상처나 감정이 다 이런 겁니다. 이런 것들은 간단하게 소멸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여자로 태어났는데, 우리 사회가 여자를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반응하는 패턴이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자는 안좋은 거야’하고 자신의 여성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형성해 갈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여자니까 약한 척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고 사랑해 줄거야’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주과는 약할 때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고 그걸 이용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프로그램화되어 외재화된 것이 공주과이고, 또 어떤 사람은 기묘하게 동정심을 자극해서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여자로는 대접받기 힘들다면 남자처럼 살아야지’ 이렇게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강하게 이렇게 결심하게 될 경우에 생리마저 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만난 어떤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좋은데, 무능한 아버지와 무능한 아버지를 싫어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는 무능한 아버지를 미워하는 어머니를 싫어하고 대신 어머니의 미움을 받는 아버지를 동정하는 아이로 자랍니다. 그는 여자이기를 극도로 거부하면서 살았는데 얼마나 그 결심이 강했는지 호르몬에 체계까지 바꿔 생리를 안했습니다. 그런 그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회복하는 순간 생리를 시작했습니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서부터였는데, 처음에는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나오고 했는데,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통과하고 나니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이 마그넷이라는 것을 통과하고 나야 비로소 보다 온전한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이 심리적 자석, 부정적 밑구조들을 원수로 생각할 수도 있겠고, 한편으로는 통과해야 할 과정이자 벗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원수로 여길 경우, 우리가 내 안에 있는 이런 것들, 경험들을 전부 다 부정하거나 깎아내리거나 없다고 합리화시키게 됩니다. 아니면 소멸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그 한가지는 들어주는 방법. 들어주는 방법은 남아있으면서 계속 나옵니다. 또 다른 방법은 '무찌르자 오랑캐!‘하는 수도 있겠는데 이렇게 하는 순간에 적대적 태도가 나옵니다. 그게 인체에는 해롭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치유하는 방법이 소멸시키는 또다른 방법인데, 이 과정은 자신이 이것을 감내하는 과정이겠습니다. 이것을 나는 리사이클링한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충격을 받았을 때 그 충격으로 인한 감정적인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때 경험한 감정이 강렬했기 때문에 흘러보내지 못하고 남아있게 됩니다. 이것이 녹아 흘러내리면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미국에 이민을 갔다가 LA와 메릴랜드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두 번 당했습니다. 그 후 차만 타면 불안해서 탈수가 없었습니다. 명상을 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차를 운전하게 되면서 미국에서 사는 것이 지옥이 됩니다. 운전을 매 번 부탁할 수도 없고 차를 타기만 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올라오고, 이동하기가 어려워서 견딜 수 없게 되니 나중에는 한국으로 도망오게 됩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침을 꽂아 간단하게 해결했는데, 이것을 해결하고 나니까 또다른 불안의 기억이 올라왔습니다. 어렸을 적 철봉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꼬리뼈를 심하게 다친 기억에서 올라오는 불안이었습니다. 역시 간단하게 소멸시켰습니다. 이렇듯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은 얼마든지 치유함으로써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통합을 위해 치유가 먼저 필요합니다. 치유하기 위해서 몇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불편한 느낌과 감정이 올라올 때, 보통 도피를 하고 ‘내게는 이런 것이 없어 !’하는 식으로 부정하면서 안보려고 합니다. 아니면 자학합니다. 이런 느낌들과 의식이 결합하면 부정적인 주시(유의)가 됩니다. 보기 싫은 것, 자신의 안좋은 측면을 자꾸 보게되는 겁니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불편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그 불편한 감정을 온전하게 직면해 주면 완전하게 소멸되지는 않더라도 증폭되지는 않습니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올 때, 기꺼이 직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무의식의 깊은 층에 잠복해 들어가서 암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내 내면이 다 열리잖아요, 그러면 병이 안걸립니다. 내 안의 사랑과 행복의 가능성의 씨앗이 피어나면 병걸릴 일이 없습니다. 병은 내 안의 잠재적 씨앗이 피어나지 못해서 걸리는 겁니다. 내가 Yes Therapy를 만들었는데, 치유하기 위해서는 ‘YES!’ 긍정해 주어야 합니다. ‘YES!’ 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부정적인 것이 올라와도 ‘YES!’ 해줍니다.

여러분들의 불편한 감정은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경험에서 옵니다. 어린 시절 무의식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은 모릅니다. 치유하기 위해서는 의식에서 무의식의 감정 덩어리를 찾아서 다뤄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치유가 되어야 명상이 됩니다. 명상은 결과치로 오는 것입니다. 주요한 부정적 감정의 리스트를 봅시다. 두려움, 분노, 좌절감, 미움, 질투 등등입니다. 불행하다는 감정은 이런 부정적인 감정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에 대해 긍정해줍니다. ‘예스!’ 합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더라도 ‘내가 이런 못난 사람인가’하지 말고 ‘이런 감정을 느끼더라도 괜찮다’고 해주는 겁니다. 그래야 이런 감정들이 미해결상태로 남아 내 안에서 제약을 낳고, 통합을 방해하고 하지 않도록 치유하고 해소할 수 있는 단서가 생깁니다. 이 감정을 직면해서 만나주고 다뤄줄 때 두려움과 분노, 좌절 등의 부정적인 감정 너머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안거치고는 진정으로 해방된 공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의식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임맥 라인 뒤의 심맥(또다른 표현으로 예스맥, 한바다님이 처음 쓰는 개념임.)이 있습니다. 이 심맥은 오장육부의 에너지를 받아 감정을 전달합니다. 내가 ‘예스!’해준 것들은 정체되지 않고 흘러가고 소화가 되는데, ‘노우!(안돼!)’한 것들은 심장에 남든지, 명치부분이나 다른 장부에 남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슨 행위를 했을 때, 화나면 명치부근이 긴장하면서 응축됩니다. 이렇게 되면 생명에너지가 못 흘러가니까 굳어지고 병이 생깁니다. 오래되면 당뇨나 암이 됩니다. 그런 감정들에 대해 거부하거나 저항, 도망하는 것은 의연하고 떳떳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를 분열시키고 위축시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나옵니다. 그러면서 문제가 커지는데요, ‘예스!’라고 해준다는 것은 내게 일어나는 감정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일어나도 괜찮다’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청중질문 :타협하라는 말입니까?) 예, 타협해야 합니다. 수용하고 긍정해주는 겁니다. 만약 이 감정들과 싸우려들면 병들거나 심하면 자살하게 됩니다.

머리의 의식이 무의식의 감정들과 타협하여, 머리와 무의식이 통합이 되고 다른 사람과도 통합이 돼야 온전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분열되어 있으면 절대로 다른 사람과 약속을 못지킵니다. 내가 약속을 해놓고 시간이 지나면 불안이 스윽~ 올라옵니다. 내가 억울한 것 같고, 손해보는 것 같고 두려워집니다. 그러면 휘익~ 반대로 움직입니다. 자신이 약속을 안지키면 잘못되니까 상대방이 나쁜 놈이라는 이유를 만들어 모략을 합니다. ‘저 사람이 저래서 내가 약속을 못지켰어’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분열되어 있으면 약속을 할 당시에는 맞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다른 감정이 올라옵니다. 의식이 말한 것을 무의식이 배반하는 겁니다. 그런 무의식과 만나주고 이해해주고 화해하여 해소해주게 하는 것이 ‘괜찮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화해가 안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통합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고 다른 사람과 늘 싸웁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해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불안과 불편함이 오더라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괜찮다!’해주세요. 여러분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쪽팔림이 일어나도 괜찮습니다. 불안, 두려움, 미움도 다 받아주세요. 제 1단계는 “이런 느낌이 일어나도 괜찮다”고 해주세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느껴주면 가벼워집니다. 그 다음 단계는 편안하게 주시해주는데, 먼저 받아들이고 나서야 주시가 가능합니다. 주시에 그치지 말고 세 번째는 따뜻하게 감싸안아주면 됩니다. 치유를 하려면 무의식에 들어가 주어야 합니다. 의식에 대한 이런 것은 여러분의 삶에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몸이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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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창조하는 것들 중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한 부분이 언어입니다. 초점을 어디에 두고있는 언어를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후천시대 언어는 ‘YES!'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생존해오면서 임맥에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 왔습니다. 임맥은 코밑 인중부분부터 시작되는데, 임맥라인은 섭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호흡을 통해서, 음식을 통해서 섭취하고 내려가는 라인이 임맥입니다. 먹는 것이 못 내려가고 가스가 위로 솟구칠 경우 문제가 됩니다. 호흡이나 음식도 그렇지만 마음 또한 내려가야 합니다. 외부에서 받아들인 정보가 내려가 줘야 합니다. 못내려가고 걸리는 것, 그것이 미움이나 원망입니다. 이해하고 소화하고 내려가주면 나쁜 것은 똥으로 나오고, 좋은 영양물질은 걸러져서 뒤의 독맥라인을 통해 올라가서 회전을 하게 됩니다. 임맥은 한마디로 관계라인입니다. 짐승은 관계를 맺을 때도 뒤로 맺지만 사람은 직립하여 앞으로 마주보며 만납니다. 인간은 마주해서 영양분을 교류하는데 따뜻한 감정들이 그것입니다. 물질이 소장에서 따뜻하게 흡수되면 그것이 심장으로 올라가 따뜻함, 사랑(에너지)으로 변환되고 이것을 마주보며 교류하는 겁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이렇게 진화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Yes Program'입니다. 내가 ’YES!'가 돼야 상대방에 대해서도 ’YES!'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심맥인데, 내가 포용, 긍정, 인정을 해줘야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용서 못하면 못내려 갑니다. 그 중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괜찮지 않다, 안괜찮다’입니다. 중요한 것은 밑에서 올라오는 그 어떤 감정이나 느낌에 대해서도 ‘괜찮다’고 해줍니다. 무의식의 감정들, 느낌들을 ‘괜찮다’고 해주는 것은 자신의 밑과 마주보기 하는 것입니다.

임맥 프로그램은 챠크라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챠크라는 생명과 의식에너지입니다. 원래의 생명과 의식에너지는 인간이 꽃피워내도록 설계돼 있는데, 인류사에서 직립하여 마주보며 관계맺기 역사가 오래지 않아 사랑으로 관계하다가 화나면 쳐버립니다. 이것이 인류사에서 상극(相剋)의 역사입니다. 인류집단이 이렇게 치고 받고 하며 상처를 주고받은 것이 임맥라인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남자 여자끼리, 또 종족과 종족끼리 치고 받은 것들, 특히 종족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종족의 남자들이 패배한 종족의 여자들을 강간한 기억이 성의 프로그램화되어 인류 전체에 상처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자 마자 사랑과 함께 그런 상처들을 같이 주고 받게 됩니다. 탁월한 스승들은 인간세상을 초월해갔는데, 인간 집단의 무의식의 상처, 기억들을 통과하지 못하고서는 진정으로 초월해 갈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임맥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세계의 이 모든 감정들을 온전히 경험하라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희비애락, 오욕칠정을 경험하기도 하겠지만 그 가운데에 인간의 진정한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씨앗도 다 열어놓았는데, 그것을 찾아내서 취해야 합니다. 'YES!'를 통해서 그 씨앗을 개화시켜낼 수 있습니다. 임맥은 결국 모든 것을 포용, 긍정해야 열립니다.

여러분들이 육체의 어떤 기관 중에서 예를 들면 성의 집단적인 침해와 수탈이 있었다면 여성들의 경우 성관련 기관을 더럽다고 인식하는 사고를 거기에 주입해 놓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기분 나쁘고 아픕니다. 어려서 성희롱을 당했다 칩시다. 그러면 그 메시지가 올 때마다 괴롭습니다. 성 기관들은 원래 해피하게 설계돼 있습니다. 이것을 치유하기 귀찮으니까 옛 스승들은 위로 초월해 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상처들은 우리의 과거이고 인간의 과거인데, 이것을 치유해야만 위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힐링해주기 위해서 포용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성이 자신이 여성임을 존중해주지 않고 사랑해 주지 않으면 생리할 때마다 아픕니다. 내가 내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으면 오장육부 중에서 비장이 상합니다. 옛날 패러다임에는 육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패키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진화해 가는 과정 중에 있고, 세상을 살아가는데서 가장 필요하고 유용한 우리 자신의 일부이자 벗입니다. 이것을 온전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기자신도. 여기서 자기 자신이라 함은 여러분의 육체를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나라고 여기는 자아의식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의식보다 더 중요합니다. 자아의식이 무의식을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들이 나라고 여기는 자기자신에 대한 평가가 있잖습니까, 그것에 의해서 나의 행복이 결정이 됩니다. 행복의 에너지는 내가 내지만 그것의 근원은 내가 내리는 자기자신에 대한 평가에 달려있다는 얘기입니다. 즉 ‘나는 불행한 사람이야’ 평가하는 순간에 어떻게 됩니까? 내가 불행한 사람으로 경험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행복한 사람으로 평가하느냐, 안하느냐는 여러분 자신을 여러분이 긍정하고 수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온전하게 평가하고 사랑을 주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남에게는 사랑을 베풀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면 안된다’, ‘이기심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또 하나의 선언(신념)이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라는 것은 억압하면 할수록, 짓눌릴수록 화산처럼 폭발한다는 겁니다.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의 심장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도 열리지만, 자신을 긍정하고 인정해줄 때, ‘나라는 녀석이 괜찮다’, ‘좋구나’ 해줄 때도 열립니다. 여러분의 심장과 마니뿌라를 연결하는 선상에 나라는 의식(나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는 것을 짓밟아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만 자기 자신도 사랑해줍시다.

여러분의 심장(흉선)은 사랑을 나누는데, 여러분의 심장을 느껴보면서 “나는 나를 사랑한다”,“나는 사랑스런 존재다”고 말해보십시오. 이런 말에 대해 다른 또 다른 말이 올라옵니까? 이럴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가인정받고 싶었던 데서 오는 반응입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십시오. “나는 행복한 존재로서 사랑스럽다.” 어떻습니까? 여성들은 행복하고 사랑받는 느낌이 자궁까지 내려가고 남자들은 신장으로 들어갈 것인데, 그러면서 몸이 건강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어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혹 불안이 올라온다면 “내가 불안이 올라오더라도 괜찮다.”고 해보십시오. 편안해 질 겁니다.

이제 치유의 언어로 들어 갑니다. 각자 자신에게 “참 수고했어.”해보십시오. 힘들어진 순간을 떠올리면 일어나는 “이것 때문에 불행한 존재이다”하는 생각(프로그램)을 해체하십시오. 어려웠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건재하고 행복하다, 참 너 수고많았어.”해주십시오. 내부에서 뭔가가 흘러내릴 것입니다.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와 사랑을 흘려보내며 “사랑해. 고마워. 참 수고했어.”하십시오.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도 사랑과 미소를 보내주며 말해보십시오. “ 사랑해. 고마워. 참 수고했어.” 얼어있던 경험층들이 따뜻함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것을 체험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자신이 하나가 되십시오. 진정한 그윽함과 평안함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3

“나는 나의 느낌을 존중한다. 비록 불편할지라도 기꺼이 이 느낌을 받아들인다.”
“나는 이 느낌을 기꺼이 놓아 버리고 온전해진다.”

임맥 앞쪽의 이 라인은 수용과 긍정, 포용을 할 때 열립니다. 인정과 존중은 마니뿌라, 사랑은 심장(흉선), 단전(소장)은 흡수인데, 인정하고 존중할 때는 흡수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안됐을 때 찌꺼기가 걸려서 임맥이 뒤범벅이 돼 있습니다. 수용하고 인정할 때 행복은 저절로 열리게 돼 있습니다. “사랑해요. 고마워요. 참 수고했어요.” 이것은 치유선언문입니다. 어린 시절의 나가 여기 가슴 한 가운데 있습니다. 감정을 만들어내는 센터로. 그런 나를 치유해줬을 때 부정적인 감정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통합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와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의식에서 만들어낸 나와 다릅니다. 그것으로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납니다. 척하는 가면(mask)와 실제의 가슴이 모순된 갈등구조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척해서 아니면 나중에 뒷담화를 하게 됩니다. 뒷담화는 우리의 분열된 모습입니다. 내가 통합이 되면 뒷담화가 없어지고, 나는 나로서 온전해지고 떳떳해집니다. 여러분들이 기꺼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힘든 나를 경외하며 그 수고로움을 존중해주며, 긍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통합이 됩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의 나가 중요한데, 숨겨진 나가 이상의 나와 간극이 클수록 외부적으로 파토들을 일으킵니다. 이상의 나는 사회에서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런 것들을 내가 체험하는 것인데, 내가 내부적으로 이 라인을 추슬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선 여러분이 여러분을 지원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나는 3개의 나가 있습니다. 현재의식에서 쓰고 있는 나, 무의식의 나, 그리고 그것을 초월한 나(근원적으로 온전한 나)가 있습니다. 초의식이라고도 하고 영이라고도 합니다. 그 어떤 것을 표현하든지 이 3가지 내가 통합이 돼있어야만 완전한 나가 됩니다. 초월적인 나, 초의식의 나는 근본적으로 내가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거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림자(마스크)와 무의식의 분열이 에너지를 흐트려버리기 때문에 내가 사랑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임맥라인이 통합돼 있으면 사랑이 자연스럽게 일상생활 속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인류사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애쓰다 보니 자연스런 사랑의 마음을 억압을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치고받은 것들이 상처가 된 것들이 남녀간, 부모자식간의 문제들입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부모들도 사실은 진화해가는 과정 중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용서하십시오. 부모도 용서하고 자신들도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우주가 치유가 되어야만 합니다. 키포인트는 숨겨진 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알아주는 데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지원해 주십시오. 이것이 상생의 패러다임입니다.

삶은 일과 대화(교류와 소통), 존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랑해요’ ‘고마와요’는 관계의 교류, 대화의 말입니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상대방도 의견을 가진 존재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말이 ‘참 수고했어요’, ‘괜찮아요’라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지성입니다. ‘참 수고했어요’는 ‘참’은 내 입장보다도 상대방의 입장에 더 비중을 둔 중요한 언어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다보면 실제로는 그 말은 내가 내 자신에게 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말을 해줄 때 나도 풀립니다. 다 같이 해보겠습니다. “참 수고했어요!”

한바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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