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2011

해피타오 3월 메인세션 소감문

Hello,

My name is Jan and I’m from Belgium. I met my Korean wife,선화, while travelling in the Philippines in 1999. We got married in 2003 and we lived till September 2010 in Belgium. In 2007 our son Jun was born and in 2008 our daughter Sora was born. In September 2010 we moved to Seoul and we’re thinking of spending the rest of our life in Korea.

I’ve always had a very difficult relationship with my father. I see him as 90% rational thinking and 10% emotion. Principals like responsibility, respect, honesty, hard-working and loyalty were for him always much more important than love. My father could get very angry when things didn’t go the way he had planned it. I felt that he gave me no freedom to make my own decisions. It seemed to me that he planned my life and that I just followed him. I couldn’t feel any love for him, nor could I feel any love from him. Slowly I started closing me more and more for him and I only talked to him when necessary. But I did feel respect for him. I had a younger sister and my father always treated us equally, he was always honest and never had the intention to harm other people. But still I could feel no love for him…

I’m 41 years old now and when I look now at who I am, I don’t seem to differ so much from my father. In relationship with my wife and children it also seems that first some conditions like responsibility, respect and hard-working have to be fulfilled and then I could experience love. For me that was normal, because that was what I learned my whole life. There would always be anger, frustration and uncertainty in myself. I didn’t know how to ventilate this, so it stayed inside me and piled up, waiting to explode. I would then express my anger and frustration towards the people I love the most, my wife and children. And I felt so bad about this, because I didn’t want to hurt them, I wanted to love them. So I created a “bad I’, a bad image about myself. There were times that I felt depressed and that I didn’t want to see anybody. Since there were children I’ve lived with a lot of ups and downs. Every time I hurt the feelings of my children, deep inside myself I felt the pain and suffering from when I was a little boy. And I didn’t want my children to experience the same pain I always felt.

I’ve never really been into meditation and yoga. Probably I was a too much rational person. 선화 did some meditation in Thailand. She told me often that it also would be a good experience for me, but I didn’t think much about it. Two years ago I could see that something needed to be done, or otherwise our family could not survive this. I started consulting a psychologist and I felt better. I even briefly had a better relationship with my father, but after a while it went bad again. After moving to Korea I started consulting a psychiatrist, who used hypnosis techniques. He could make me go back to my childhood and experience the pain I then had. I felt better after that, but only for a short time. At that time 선화 started the meditation-yoga meetings with happytao. I could see that she felt very good there and she suggested me to go too. I went and I liked it. I liked the people and I felt relaxed there. But after a few visits I felt that these meetings could also not cure me and I felt unsure. 선화 did a meditation session in Kwangju and also recommended it to me. I hesitated but finally agreed.

I took the train from Seoul to Kwangju. The house I stayed in was basic compared to our apartment in Seoul, but the company was good : 한바다선생님, 지애님 and 포도 (a lovely dog). We spent there one week together. Our days were filled with meditation, yoga, some walking and tasting the delicious Kwangju food. I felt very comfortable there and I opened myself completely. Slowly I could connect to my inner being and later I was able to feel energy flowing from my forehead through my lungs to my stomach. I never thought I would be able to experience this. I could go deeper and deeper and deeper into myself. It felt amazingly good, but also a bit scary, because I didn’t know where it would end. The last couple of days 선화 came to visit me in Kwangju.

During the last meditation session we had a big confrontation. 선화 was looking in her life for unconditioned love. I expected her first to take responsibility and then I could give her love. It felt like a big rock in my stomach was blocking the river of love. I had a hard time then. I felt the pressure in my head getting too much and emotionally I broke down. I don’t remember everything what happened next. I stood up, shouted, ran to my room, slamming the door. I stood against the wall, crying and wanting to shout out loud, but I couldn’t produce any sound. My whole body was tense and I had problems breathing. 한바다선생님 and 지애님 were holding me and trying to calm me down. The pressure in my stomach became bigger and bigger until I seemed to explode. I could feel the rock of pain which I have carried since my childhood get out of my stomach. I calmed down and started to breath normal again. 한바다선생님 and 지애님 helped me to lay down on the floor. I can still see 한바다선생님sitting there and asking me “what do you feel now”? I said “the rock is gone and the river is flowing, filled with pure, unconditional love”. I know 한바다선생님 felt good then and I felt amazing. After all these years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experienced absolute freedom. 선화 came into the room and sat next to me. I started laughing like a happy child, full of joy.

That afternoon I went to the sauna and I washed the dirt from the past of my skin. I felt like reborn. Reborn in Kwangju. In the evening we had a kind of reunion. There was 한바다선생님, 지애님, 선화님, 예인님, 원무님, 원화님, 포도 and me. We held hands and chanted om shanti… I felt that these people had given me the biggest present anybody could ever give me, my freedom. Thank you!!!

The next morning my wife and I drove back to Seoul. I felt light and bright, but also unsure, because I didn’t know how I would react to the outside world. Back in Seoul it felt great to see our children again. That evening I called my father and I told him about my experiences during my meditation session in Kwangju. I told him that I felt ready to make a new start and my father felt happy. Maybe it was the first time in our life that we both felt this happy connection. I don’t know what the future will bring and I’m sure there will still come some difficult moments, but there is again hope for our family and I think we can make it.

Thank you happytao

3.30.2011

<지구 바라봐주기> 운동을 제안한다

INTERVIEW




소상 이상훈으로부터 듣다
지구 바라봐주기 운동을 제안한다

2011년 3월 21일 이른 저녁, 양재역 부근 커피숍에서 소상(笑象) 이상훈님을 만났다. 그는 우리들 사이에서 관법(灌法)과 화두선(話頭禪)에 상당히 정통한 이로 알려져 있으며 몇 차례에 걸쳐서 격월간 <해피타오>에 실린 회원칼럼을 통해 그 일단과 면모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번에 만남은 일본상황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있는 지구적 과제, 우리의 대응에 대한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그에 의하면 관법의 이해 실천편에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한다. 진지한 열정으로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던 그의 얘기들을 옮겨 적는다.



먼저 그가 요즘 지구가 겪고 있는 느낌은 어떨까? 의외로 대답은 간단하다.
전체적인 흐름이나 향방은 잘 모르겠고 다만 기운이 강해지고 있는 느낌은 있어요.
이어 바로 요즘 그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 사안으로 재빠르게 급선회, 해피타오 가족을 비롯한 다른 모든 분들에게 제안을 하고 싶단다.
요즘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들을 이용해서 뭘 좀 하려고 합니다. 해피타오 식구들도 같이 참여해서 이게 전 세계적으로 퍼뜨려졌으면 좋겠어요. 다들 예언을 해요. 예를 들어서 상원사에 계셨던 탄허 스님이라고, 1983이미 입적하신 분이지만 한국과 지구의 미래에 대해 여러 예언을 했어요. 북극해의 얼음이 녹으면서 지구인구의 60~70%가 죽는다거나, 지진과 원자핵 폭발에 의한 인류의 희생 등에 대해 예언을 했잖아요. 한바다님의 <3천년의 약속>에도 지구대변동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화성소년 보리스카도 그런 얘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고, 인류대재앙과 환란에 대한 기독교 성서에도 그런 얘기들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답답한 것은 온통 죽는다는 얘기는 있는데, 어떻게 하면 지구와 환란에 처한 인류를 구할 것인가 하는 얘기는 없어요. 지금 시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지구를 관(觀)해주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구와 하나가 되어 명상을 한다든가, 지구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 큰 애정으로 감싸주는 등 각자가 자기 나름의 수준과 방식에 따라 지구 봐주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는 것이 좋고, 소수가 동참하다가 점차 수백, 수천의 사람들, 나아가 전 세계인들이 그렇게 해나갈 때 나는 분명히 지구가 치유된다고 봅니다. 나는 관(觀)만이 업을 사그라뜨릴 수 있는 있는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격월간 <해피타오>에 그가 연재한 글에서 이미 관(觀)에 대한 그의 견해, 즉 관이란 무엇인가, 관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관을 통한 업식의 소멸원리 등이 설명돼 있다. 글에서 지구바라보기, 관(觀)을 통해 어떻게 지구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가에 대한 의아스러움에 답하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다소 길지만 옮겨본다.
관법觀法이란 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무런 기준이나 기대 없이, 즉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호흡, 자신의 몸과 동작, 자신의 생각과 감정, 더 나아가 자신의 육근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따라 움직이는 자신의 모든 의식을 의도 없이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에고 활동을 바라보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도 없이’ 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식으로 의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법 수행이 왜, 또 어떤 이유로 업을, 에고를 소멸하는 걸까요? 양자역학에서는 광자나 전자 같은 소립자는 입자로 혹은 파동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그것이 입자로 혹은 파동으로 존재할까요? 그것은 입자를 관찰하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른 것입니다. 즉, 이를 입자로서 보고자 하면 입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관찰하는 주체가 없다면, 즉 관찰한다는 의도가 없다면 이것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론이 아닐 수 없지요. 결국 소립자는 관찰자의 생각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입자가 입자이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입자는 관찰자의 생각의 반영입니다. 이를 불교적으로 환원하면 입자는 결국 업인 것입니다.
물론 업은 단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업이란 처음에 한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또 그러한 생각이 반복되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으며 그것에 대한 개인의 호ㆍ불호의 경향성으로 나타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끼리 서로 작용과 반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를 양자역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이 세상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하면 소립자들은 그 생각대로 입자를 구성하며 그것이 화학적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대상들은 우리의 생각에 의해 가능성의 파동의 상태에서 고정된 입자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이를 심리 상태의 과정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을 내용인데도 자신에게는 과거의 기억, 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정한 경향성으로 인해 타인의 말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 화는 체내에서 어떠한 화학적 성격을 지닌 물질을 발생시켜 그것이 얼굴을 붉게 만들며 그 타인에게 화를 표출하고 이는 몸의 균형을 깨뜨려 그것이 지속이 되면 몸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의도 없이 바라보아 소멸시키는 것이 관입니다. 관은 의도 없이, 그리고 선택 없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미 고정화되어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는 육체 또는 마음의 상태를 다시 가능성만 존재하는 공空의 상태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인식할까요? 이 몸과 그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것이 ‘나’라고 인식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고정시키는 시각입니다. 결국 스스로를 입자화, 즉 물질화시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정 지어진 ‘나’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끌고 가는 주인의 삶이 아니라 생각에 끌려가는, 경향성에 끌려가는 노예의 삶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아무런 의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일, 즉 관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입자로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과 밖이 교류할 있는, 생명력이 넘쳐날 수 있는 자유로운 파동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업을 해소하는 길입니다. 관은 바로 업을 정화해 나가는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이며 새로운 창조를 위한 준비입니다.
여기서 ‘의도 없이’, ‘선택 없이’란 표현은 바로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으로 음도 양도(색) 아닌 중도(공)의 표현으로, 양자역학에서의 관찰자 없는 바라봄, 즉 의도 없는 마음입니다. 선가의 3조 승찬 선사는 <신심명>이라는 글의 첫머리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다만 간택을 꺼릴 따름이라. 미워하고 좋아하고 하는 마음만 버린다면 지극한 도는 명백하리니.”라고 말합니다. 분별심 없는 마음이 곧 진리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계속 하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란이 지구가 가지고 있는 업(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지구가 지금 소녀에서 성인여자로 바뀌어 가고 있는 과정에서 치루는 생리통이라 말하고 있는 사람, 혹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이다, 아니다 지구내부가 더워지고 있어서 그렇다 등등 여러 해석과 의견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맞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게 사실이다, 이게 팩트다, 지구인의 반이 죽는다, 90%가 죽는다, 뭐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는 겁니다. 어떤 분은 지금 여기에 100% 머물러 있으면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만, 나는 그 사람이 정말 마음공부 하는 사람인지 의아스럽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100% 존재하는 사람이 과연 지구상에 몇 명이나 될 것이며,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죽어가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할 지구 전체의 운명을 봤을 때,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공부의 목적, 마음공부의 목적과 목표를 상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데로 넘어가면 보살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 내가 쓴 글에도 그런 내용이 언급돼 있을 겁니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로 목숨을 걸고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려면 보살도가 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붓다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붓다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아요. 붓다가 되어 100% 있다, 그것은 붓다가 아닙니다.

그러면 지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한 개인의 업을 녹이기 위해서 관을 시키듯이, 지구라는 행성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우리가 같이 지구의 고통과 통증을 바라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녹는다 이겁니다. 관이라는 것을 전문적으로 해본 사람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건데요,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관하고 명상을 하면 됩니다. 지구를 떠올리며 애정으로 바라봐 줘도 될 거고, 지구를 느끼면서 진아(공)의 자리에서 무심으로 함께 하는 수도 있겠습니다. 동시에 지구를 느끼면서. 동시에 느끼면 내 육체적 아픔이 있겠지만, 항상 진아의 마음으로 육체와 지구를 하나로 연결시켜서 바라보자는 거죠. 다같이. 한바다님과 지난 주에 만나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순간에도 계속 일본을 관하며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일본이 안정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 이제 일본이 괜찮은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한바다님께서도 동참해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페이스북이나 이런 것을 통해 가지고 전 세계에 퍼뜨려보자는 거죠. 지구가 환란이 일어나는 것을 다 막지는 못할지라도 완화시켜 보자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많은 개체적 생명들을 살려낼 수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보살도(菩薩道) 중에서도 진리를 깨치게 해주는 것이 가장 큰 보살도지만, 법화경에서도 나와 있듯이 일단 그 사람이 겪고 있는 현재의 고통을 덜어주면서 다음 스텝으로, 근본적인 인간고들, 즉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봐요. 지금 당장의 고통도 덜어주지 못하면서, 생로병사 문제도 도와주지 못 하면서 자기 혼자 지금 여기에 100%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나는 이해가 안 됩니다. 도가 낮아서 그런가 봐요. 지금 저는 이것을 하자고 계속 주변에 얘기하고 다니고 있어요. 내가 페이스북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동참을 촉구할 거예요. 많은 지구인들이 함께 할 거라 생각합니다.

(잠시 침묵) 마주 앉아 듣고만 있는데 그의 절실함과 진실한 마음에 감응되면서 따스한 감동이 일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지진이 터지기 전 날인가 갑자기 내면에서 ‘지구를 구원할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3일인가 4일인가 기도를 했는데, 응답이 페이스 북이에요. 왜 응답이 페이스북일까 의아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다 같이 관을 하자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바다님이 적극 나서 주시고, 스님들 화두선 하는 것 잠깐 멈추시고, 기독교인들 역시 기도로 동참해주시고, 모두들 지구 바라봐주기를 합시다 이거죠. 이게 개개인 차원에서는 대단치 않게 여겨질수도 있어요. 그러나 전체적인 차원에서는 상상이상으로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 많은 종교인들이 일본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설령 지금 지구의 몸살이 지구의 업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자연재해라 치더라도, 지구의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성장통이라 할지라도, 지구의 고통을 좀 덜어주자, 생리통이 일어나는 것을 좀 덜어주자, 좀 덜 아플 수 있도록 해주자, 그것을 통해서 또한 되도록 적은 희생에 그치도록 하자 그거에요. 이런 취지로 생각했던 건데 타이밍을 약간 놓친 감은 있어요. 일본이 안정화되면서 좀 게으르고 싶은 마음이 약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면, 그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기운을 많이 받는 것을 좋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좋은 기운으로 지구 바라보기를 해주자 이거죠. 우리가 사람을 치유할 때도 사실은 그 사람을 나와 하나로 느껴서(관해서) 녹여주는 거거든요. 그것이 힐링의 과정인데 지구 바라보기도 같은 맥락이거든요. 힐링 방법론에 관한 얘긴데 예전에 제가 관법에 대하여 처음 썼을 때 그런 내용이 있어요. 마음적으로 관이 무엇이냐 하는 사상적 이론의 이해부분이었다면, 오늘 제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것의 실천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내용의 발기문과 취지 등을 영문과 일본어로 준비하고 있어요. 일본이 안정화되었지만,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즉 또 다른 재해가 발생한다면 지속적으로 퍼져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해피타오 가족 여러분들도 가족들은 물론, 친구와 동창들에게 알리고 함께 하자고 말씀드립시다. 지구 바라보기 운동(가칭) 법화(法華) 형에게도 얘기했더니 동참하겠다, 친구들에게도 얘기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앞으로 흐름은 어떻게 될 것 같나요? 혹 잡혀지는 것들 있어요?
(고개를 흔들며)몰라요, 난 그런 거 몰라요. 그냥 지금 고통스러운 것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요.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이고 지구가 겪고 있는 고통을 느낄 뿐이에요. 지금 지구적으로 기운이 강해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느껴보면 지구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 고통, 괴로움도 파워일 수 있는 거예요. 지구 내부에서 끓고 있으니까 힘이 솟고 있는 것 같지만, 지구 전체적으로 괴롭다고요. 앞에서 괴로우면 괴롭잖아요. 이게 정상적인 거죠. 지금 여기가 괴롭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 괴로움을 없애야지, 그렇잖아요? 지금 배고프다는데 라면이라도 끓여줘야지, 내일 뷔페 약속을 하면 뭐해? 나는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고, 그런 능력도 안 되지만,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런 시기에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자는 말이 선적으로 맞을 수는 있습니다(그것은 차원에 따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겠지만, 공부도 모르고 윤회를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하게 되는데, 핵폭발에 의해서 지구 인류가 60~70% 정도가 죽는다는데, 일본에서 해일이 일어나서 2만 명이 죽었어요. 몇 억 인구 중에서 2만 명은 그리 큰 비중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지진과 핵폭발에 의해 지구 인구가 60~70% 죽는다는데, 지금 일본에서 일어난 것처럼 이 얼마나 심각하겠어요?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비상식량 확보하고 산으로 올라가서 대비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다 같이 지구 바라보기를 해주자 이거예요. 지구의 고통을 느끼면서 그 고통을 바라봐 주자, 지구를 사랑의 마음으로 안아주자 이겁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화도 많이 냈어요. 지금 일본이 지진과 해일, 핵폭발 위협으로 저렇게 힘든데. 물론 일본 상황이 대양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파도일 뿐이죠.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지만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공의 세계에 빠져있을 수 있겠지만 어차피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표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봐줘야 될 것 아닙니까?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밥을 줘서 생로병사가 없는 세계로 끌어줘야 되고, 아픈 사람은 안 아프도록 해주듯이-물론 이렇게도 안하는 사람이 있지만-마찬가지로 지구는 바라봐 줘야 한다는 겁니다. 몸이 아프든지 마음이 아프든지 그것을 힐링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라봐 줘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대화를 통해서 아~하도록 해주는 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게 마음을 치유하는 거예요. 예전에 자신이 수행을 하면서 나를 바라봐 주었듯이 지금은 상대를 바라봐 줘서 그 마음을 녹여주는 거죠. 이렇게 역시 지구를 바라봐 주자는 말이에요. 그 지구의 생명체도 붓다가 되게 해줘야 된다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지금 제게는 이것이 가장 절실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블랙홀에 들어가 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블랙홀에서 다시 화이트홀로 나와야 된다는 거죠. 나온 사람이, 나와 있다면 사람이 배고파하면 밥 사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목마르면 물주는 것이 맞는 거고. 인터뷰라니까 적나라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보통 때는 실실대는데 이건 얘기해야 될 것 같고, 아마 이 책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나올 때쯤이면 페이스북에서 작업이 어느 정도 진전돼 있지 않을까 싶네요. 아마 다음 주쯤에는 페이스 북에 한글, 영어, 일본어 정도로 올리면서 퍼지기 시작할 거고, 그 밖의 다른 언어권에서 사는 외국인들에게는 자기들 나라 언어로 번역해서 널리 퍼뜨려 달라고 당부할 거예요. 가능한 한 쉬운 언어로 전달을 할 계획이에요.

이제 개인적인 영역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성장기 이야기나 자신의 생의 이력을 좀 개괄적으로나마 얘기해 줄 수 있나요?
그냥 대충 살았어요. 그러나 유일하게 했던 것은 마음공부는 치열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관을 24시간 내내, 즉 잠자면서도 하고, 죽자고 나를 바라보기를 했죠.

마음공부에 입문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뇨, 그냥 갑자기 시작되었습니다. 29살 때쯤 되었을 거예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반야심경을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그 전에는 절에도 한 번도 간 적이 없고, 절이라는 것도 해본 적도 없고,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반야심경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더니 그 생각이 떠나질 않는 거예요. 마치 내 안에 프로그래밍 된 어떤 것처럼 말이죠. 결국은 서점에서 가서 반야심경이라는 책을 한 권 샀어요. 읽는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단번에 다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까 머리 속에 ‘명상’이라는 단어 하나가 남더라고요. 그래서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법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맨 먼저 젖힌 페이지에 사념처(四念處) 관이 있었어요. 몸을 관하고, 호흡을 관하고, 생각과 감정을 관하고, 법을 관하라는 것이 사념처 관인데, 이백 몇 십 가지 명상법을 다 읽어 보았는데 그것이 제일 맘에 들었습니다. 그 때는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것만 팠습니다. 혼자서 미친 놈처럼 이렇게 해보았다가 저렇게 해보았다가 하는데 여러 번 막히고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그래도 그 것 밖에 할 것이 없었어요. 치열하게 했지요. 나중에서야 그것이 석가모니 붓다의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쨌든 당시에는 온통 다 관해나간 거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따라 움직이는 에고를 다 보는 겁니다. 그러다가 잠자는 에고도 보고, 꿈꾸는 에고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숙면일여(熟眠一如)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몽중일여(夢中一如)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그런 경지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그렇게 하다보니까 유체이탈도 하고, 별의별 치유능력이 생겨 암환자도 고쳐보기도 하고, 몸도 18살처럼 젊어지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고 다 버렸습니다. 이런 것에 집착하면 안되지, 안되지 하면서 계속 간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더라고요.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렇게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는데, 그 때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가 잡힌 거예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데 답을 모르겠는 거야, 미치겠는 거야. 그 상태로 폐인 비슷하게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을 때, 화계사가 보였습니다. 거기로 간 거죠.

숭산 스님이 화계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그 때는 그 스님이 유명해지기 전이었어요. 절에 갔더니 큰 스님을 만나봐라 그래요. 큰 스님이 누구냐니까, 숭산 스님이다, 숭산 스님이 누구냐, 처음 들어보았다 하니까 우리나라 3대 선사 중의 한 분이고,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해요. 그럼 약속을 잡아주라, 만나보겠다 했고 그래서 만나 뵈러 간 거죠. 거기서 큰 스님이 질문하라고 해서 질문하는데 냅다 소리를 지르는데, 그 때 웃음이 팍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 때는 그 웃음이 뭔지 몰랐습니다. 스님이 검지를 들어 보이며 ‘이게 뭐꼬’하고 물으라고 해요. 그래서 조실방 앞을 나서면서 스님이 가르쳐주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이 뭐꼬?” 한 거지요. “웃는 이것(웃음이 터졌으니 웃는 그것)이 도대체 뭐꼬?” 딱 한 번 했는데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었어요. 그러고는 비가 오는 날인데 거기서부터 2킬로미터 정도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내려갔어요. 수유 네거리까지 그렇게 내려가다가 뒤늦게서야 내가 인사를 안 드리고 왔다는 생각에 미친 거예요.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고 다시 올라갔더니 어떤 스님이 서 있다가 내가 너무 좋아하고 있으니까 ‘희마(憙魔)’라는 게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것도 마(魔) 아닙니까? 그래. 내가 그 스님보고 “조주 선사가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는 물음에 왜 무(無)라고 했는지 아세요?” 물으니까 그 스님이 “왜 했습니까?” 그래요. 그래 내가 왜 했냐, 안했냐? 하니까 무(無) 했죠. 그러고는 내려왔습니다.

그 뒤 “큰 스님이 오시라는데요” 해서 갔는데 그 때부터 숭산 스님과 일종의 인터뷰를 하면서 맨 날 깨진 거예요. “아니다, 아니다!” 답을 해도 “아니다!”하는 거예요. 그러다 하루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오늘은 기어이 숭산을 꺾고 와야겠다 결의에 차, 스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숭산 스님이 “나 오늘은 몸이 불편해서 인터뷰를 못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내가 노인네를 거꾸러뜨린다.’ 하면서 슬그머니 마음을 내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선문답의 세계에서 보면 그 때 벌써 내가 진 거였던 거예요. 이미 게임 끝난 거죠. 그 상태에서 스님이, “부처님은 설산에서 7년을 고생했는데, 너는 1주일간만 참선을 해라, 1주일 뒤에 점검을 하겠다.” 하고 선방에 들어가라고 해요. 그런데 당시 한국 스님 입장에서는 그 상황이 용납이 안 되었던 모양이에요. 행자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머리도 안 깎은 녀석을, 외국인도 아닌 녀석을 그렇게 집어넣으니까 받아들이기 힘들어 해요. 그래서 속으로 역시 ‘개는 뼈다귀를 쫓는구나.’ 하고 나왔지요. 범은 사람을 물지만 개는 뼈다귀를 쫓잖아요. 인연이 있었던 건지, 없었던 건지. 그러면서 세상구경도 많이 하고 이런 저런 수행법들도 섭렵해 보았어요.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고 들어가 봐요. 그러고는 ‘이런 문제점이 있구나.’ 하고, 다시 ‘이런 수행법도 있구나.’ 하고 들어가서 ‘아, 이런 문제점이 있네.’ 하고. 나는 관법과 화두선을 잠깐 한 것이지만 염불도 해보고 뭐, 이런 저런......

그 뒤에 한바다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마하무드라의 노래>라는 것이 내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서 찾아갔어요. 한바다 선생님이 나는 세션도 안 해주고 했는데 책으로 많이 도움을 주셨어요. <쿤달리니 탄트라>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읽으면서 해당 챠크라들이 다 터진 거예요. 예를 들면 물라다라 편을 읽으면 물라다라가 터지고, 마니뿌라,아나하타 등등 이렇게 쭉쭉쭉 터진 거야. 읽으면서 체화시키고 그 다음을 또 읽고. 또 티벳 불교를 이해하는 계기도 생기는 것 같아서 보고 있는 거죠. 조주 선사가 자리를 잡은 게 나이 여든인가, 아흔인가잖아요. 아직 나이가 마흔 넷이니까, 공부 좀 하다가...... 하지만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변형시켜서 궁극적 진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죠. 나는 아직 공부를 많이 해야 되겠죠.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중시하는데, 법화경을 중시하는 흐름도 좀 보고, 티벳 불교도 인연 따라 조금씩 이해를 하고, 어떻게 보면 세상도 구경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부분도 구경하고 있죠. 구경은 하는데, 지금 급하고 중요한 것은 지금 있는 고통에 대해 대응을 해줄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자기 엄마가 뇌혈관이 터져 당장 죽게 돼 있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인간과 동물과 온갖 생명이 살고 있는 지구 생명체의 근본이 아프단 말에요. 급한 건 빨리빨리 봐야 할 것 아니에요. 세세생생(世世生生) 보살이 목표여야 해요. 붓다가 목표가 아니라. 육조단경에 보면 혜능스님이 이렇게 써놨어요.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 움직이면 보살이다.” 그런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견해, 법화경에 의하면 보살도를 닦아야만 부처가 된다고 해요. 모르겠어요. 나는 몰라요. 다만 우리는 하나라는 거고, 상대가 아프면 내가 아픈 거고. 안 아픈 방향으로 가고 서로 행복한 방향으로 가야될 것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부터, 지금 여기서 관계가 있어야지? 아프면 같이 아프고, 기쁘면 더욱더 기쁘게 하고...... 공(空)이란, 무아(無我)란 좋은 거예요. 그것은 100%의 사랑, 보살도예요. 한바다님도 아픈 사람들 보면 왜 나한테 왔냐 하면서도 힐링을 해주고, 뭐라고 야단하다가도 치료를 하시죠. 그 정도는 되어야죠. (이상.)

지구가 새로운 시공간대로 진입하고 있다-흔들기

한바다님 메시지 모음 ---------------------------------------------





흔들리는 지구,
지구는 새로운 에너지의 시공간대로 진입하고 있다



일본의 지진과 해일, 대규모 원전발전소 화재와 폭발로 인한 불안과 공포가 어느 정도 안정화 돼가고 있다. 전 세계인이 크나큰 애정으로 일본을 위해 기도하고 모금으로 물품과 구조 지원을 함께 하고 있다. 한바다님은 일본의 최근 사태를 계기로 대규모 참사를 초래할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인 핵과 원자력을 해체하기 위한 단계적인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한다. 한바다님은 일본의 사태 양상은 앞으로 지구가 어떤 혼란과 어려움을 당할지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또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개연성이 높은 데 이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갈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신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이가 불안에 잠식당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이 변화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보다 큰 나로 태어날 것을, 전 지구적으로 인류가 각성하여 의식적 변형과 상승을 가져오는 기회로 삼을 것을 당부한다. 지구 어머니와 그 안에 사는 많은 생명들의 희생이 최소화할 수 있도록 깨어 명상하고 사랑으로, 한마음으로 대응해 갈 것을 얘기한다. 홈피에 올라온 최근의 메시지들을 옮겨 싣는다.



1

관점을 비우고 일체한 마음의식(전체의식)에 눈뜰 때이다

쓰나미 지진 참사를 겪은 많은 생명들에 깊은 조의를 표한다. 이 크나큰 참사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일본인 형제들의 자세에 존경을 표한다. 이미 예언들을 통해서 예견되긴 했지만 전 지구에 일어나는 일들은 단지 개체적 의식으로 감당하기는 너무 크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리가 사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아야 한다. 자원착취와 생명의 큰 희생을 전제로 하고 경제적 이익의 관점에만 올인하고 있는 이 문명이 정당한 것인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전체의식의 사랑이 깨어나길 빈다.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진통이 좀 약화된 형태로 나아가길 기도한다. 불안에 떠는 여러분들 내면의 눈에 집중하고 가슴의 태양을 명상하십시오. 불안을 명상으로 삼으세요. 그리고 모금에 동참하십시오.



2

가슴의 소리-일본 대지진이 우리에게 주는 것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감동...... 누가 자기 생명이 아깝지 않으랴. 누가 죽음이 두렵지 않으랴. 누가 자신의 미래가 아깝지 않으랴. 그럼에도 의연히 전체를 구하기 위해 불나방처럼 가느다란 희망에 온몸을 던지는 181人의 의연한 결의에 그냥 눈물이 흐른다. 모두들 실시간으로 소개되는 일본 대지진 참사의 현장과 최악의 가능성과 희망에 마음 졸이며 어수선한 마음, 흔들리는 마음. 그러나 사람들과 일본 대지진의 참사를 이야기 하면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다. 그들의 의연한 태도와 침착성에, 늘 경쟁시하며 의심의 눈으로 보기만 했던 한 나라를, 우리는 놀람과 진정한 관심과 사랑으로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나다. 그들이 아프다면 우리 또한 언젠가 아플 것이다.

나는 새벽에 간세이 원전에 대해 명상하고 안전을 기도하면서 여기에는 물질적인 위험을 넘어선 영적인 섭리가 분명히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희생과 용서,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깨어나는 인류의 의식상승이 눈에 선하다.



3


지구의 회생을 위하여 명상하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일본까지 갈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도울 수 있는 길은 많을 것이다. 해피타오 가족 여러분, 모두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진심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일본의 대지진과 원전이 있는 곳으로 의식을 보내서사랑과 안전, 평화의 염(念)을 보냅시다.

육체는 시공의 한계가 있지만 마음과 영혼은 한계가 없으니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그곳으로 투사시켜 지금 위험을 줄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애쓰는 분들에게 안전과 사랑, 평화와 감사의 염(念)을 보냅시다. 우리가 마음을 합친다면 지구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펑크가 나서 신음하는 우리 생명의 모체(母體)인 지구를 위해 명상합시다.



4


엄청난 재앙과 큰일에 대한 진리적 태도

이 모든 일이 나를 깨워내기 위해 일어나고 있다. 재난도, 고통도, 내 자비심을 깨워내기 위해 존재한다. 쓰나미도, 슈퍼문(super moon)도, 2012년도, 전쟁도, 불화도 지구에 있는 모든 이들 속에 있는 ‘참된 나‘를 깨워내기 위해 일어나고 있다.

신은 고난 속에 축배(祝杯)를 감추고 있다. 그 축배는 각성(覺性)이라는 이름의 축배(祝杯)이다. 이 축배(祝杯)를 받아 마실 자, 바로 그대임을 잊지 말라.


2011. 3.

12.09.2010

2010년 해피타오 송년회 영상 -헬렌켈러...그리고 구루

happytao: Meditation master Hanbada.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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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막힘없이 흐르게 하라

마음이 막힘없이 흐르게 하라




두뇌적 의식을 평온하게 조율된 심장에 귀의시키십시오. 머리와 가슴이 하나로 만나면 온전하게 흘러갑니다. 마음이 마음을 만나주면 모든 카르마적 저항은 녹아지고 거대한 하나의 바다가 됩니다. 마음이 저항없이 흐를 때 ‘나란 의식’도, ‘너와 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만나주면 상대방의 마음(심정)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전우주적인 한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상대방 속의 에센스를 만나면 ‘나’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우주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제자가 세상을 해매이며 살다가 스승에게 옵니다. 스승은 그의 영적인 기운을 불어 넣어줍니다. 이 한 번의 불어넣어줌으로 제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근원적 떨림(레파토리), 영혼의 울림이 되살아납니다. 신비입니다. 그 아무리 악하게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붓다적 존재와 단 한 번의 공감(共感)으로 선인(善人)으로 되고, 붓다의 길에 입문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1

마음은 가능성의 공간으로서 마음이 열릴 때는 바다와 같습니다. 마음이 닫힐 때는 좁아집니다. 마음이 닫힐 때를 보면 주로 한정된 나를 인식하면서 한계를 설정합니다. 세상 속에서는 ‘내 것’ ‘네 것’이 분명하고 ‘이것은 할 수 있고 저것은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들어와 보면 여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계설정을 어떻게 합니까? 과거의 시간, 과거의 지식과 경험되어진 인식을 미래로 가져옵니다. 일종의 예측인데 과거에 이랬기 때문에 미래도 그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정은 실재가 아니고 단지 하나의 생각입니다. 생각은 어떤 형태를 부여하면서 방향이나 범위를 설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때문에 생각을 정확히 하지 않을 때는 초점이 잘 안 잡힙니다. 생각은 초점을 잡아줍니다. 이 생각은 공간적인 목표지점을 명확히 설정해주는 측면도 있지만 잠재적인 내 마음도 설정을 합니다. ‘이것 정도 밖에 할 수 없을 거야’ 하는 식으로. 마음이 이렇게 설정되면 설정된 그 상태로 그것만을 보고 그것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의 마음은 그렇게 설정되지 않습니다. 설정되어진 것은 단지 내 생각 차원의 일이고 그 생각 너머가 가능성의 영역입니다. 설정한다는 것은 곧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가 이만큼 할 수 있다고 설정(생각)하면 그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내 마음이 거기에 묶여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기능을 도와줍니다. 내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지금 현재 여러분들은 ‘나’라는 인식이 약해지고 ‘나’ 너머에 있는 마음의 근원적인 부분이 많이 펼쳐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매우 평화롭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 것에 부딪히지 않고 흘러나올 때 평화를 경험합니다. 이때에는 ‘나’라는 인식과 작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어떤 감각이나 감정에 걸리면 의식에서 저항된 그 감정과 감각의 데이터를 가지고 두뇌가 나란 것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아프다’라고 만듭니다. 실제로 마음이라는 것은 우주처럼 변화무쌍하면서도 영원한 것이지만 깨어나지 못하면 ‘나’라는 것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들 속에서는 그 영원하지 않은 ‘나’가 지속적으로 되풀이 됩니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합시다. 두들겨 맞은 것은 사실이고, 두들겨 맞을 때 아팠던 것은 감각, 그 때 두렵고 기분 나쁨 등의 감정이 있었겠지요? 맞았던 사실, 아팠던 감각은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끝난 거지요. 그런데 누가 두들겨 맞았습니까? 나가 맞았습니까? 몸이 맞았습니다. 몸이 아팠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두뇌가 그 생각(기억)을 재생하면서 아직도 계속 맞고 있습니다. 이미 끝난 옛날이지만 옛날에 두들겨 맞을 때 강하게 저항했고 다시는 안 맞겠다고 결심했던 ‘나’가 있었다면 현재도 이 ‘나’가 있어서 옛날을 현재로 불러들이면서 그것을 현실로 만듭니다. 현실로서 다시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맞을 당시 맞는다는 사실에 대처만 하면 되었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머리로 도피하면서 이 경험을 증폭시키고 이 아팠던 경험에 의식이 잠식당하면서 맞았던 ‘나’를 계속 들고 있습니다. ‘나’가 빠지면 없는데 그때 잠식당한 의식이 아픈 ‘나’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기억일 뿐인데 기억에 ‘나’(란 의식)를 결합시키면서 나는 계속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현실 속에는 그런 기억이 있을 뿐이고 맞은 나는 없습니다. 내가 빠지면 순수한 경험만 일어납니다.

청중질문 : 수많은 경험 속에 있으면서 그 때마다 ‘나’가 빠진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마음이 경험하면 됩니다. ‘나’는 그 경험을 100%(있는 그대로) 안 받아들이고 저항하면서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도피하잖아요? 그럴 때 그 ‘나’가 부정적인 형태로 구겨지면서 이 경험과 결합하게 돼 있습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저항할 때 이 ‘나’가 만들어집니다. 이완한 상태로 저항 없이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흘러넘칩니다. 여러분들은 흘러넘치는 마음의 상태를 충분히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2

비파사나의 사성제 가운데 하나인 무상(無常)이 의미하는 것은 그 어떤 대상의 작용도 현상도 영원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것이 오고 가며 명멸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비파사나의 원래적 목적은 관(觀)- 생각이나 감각, 욕구에 대해서 분별없이 지켜보면서 어떤 한 생각도 감정도, 감각도 영원하지 않다, 덧없다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도 감각도 명멸하는 현상일 뿐인데 지속한다고 착각(無智)하고 있지요. 비파사나를 수련하는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관하면서 일어나는 생각에 관찰하는 데 집중돼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비파사나를 하면서 생각이 아니라 생각과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공간, 대상이 명멸하는 빈 공간을 보아야 합니다. 무상(無常)을 가치관적으로 따지면 세속은 무의미하고 덧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해보니까 무상(無常)의 실제 뜻은 ‘괜찮다’, ‘안심하라’는 의미더라는 겁니다. 명멸하는 현상들을 지극하게 관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맑고 명징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자각의 파장이 흐르는 거지요. 인식력도 뚜렷해집니다. 이것만을 목적으로 하면 이런 저런 금기를 갖게 되겠지요. 그러나 투명하고 맑은 의식상태 자체를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은 삶의 풍요로움에 접속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명징하고 투명함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그 투명함을 바탕으로 세상에 적절히 대응하고 삶 속에서 뭔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총체적인 지혜나 힘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명징함을 추구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명징함 그 자체보다도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의 배후의 공간에 존재하는 영역에 관심이 갑니다. 모든 한 생각은 언어화된 정보이자 어떤 기준을 내포하고 있고, 그 한 생각을 통해서 우리가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생각은 늘 흐르고 우리가 반드시 어떤 세계로 들어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 공간을 의식하면서 존재 자체로 있어봅니다. 이 공간은 가능성의 상태입니다. 이완된 상태로 있어봅니다. 이완된다는 것은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머물고(現存) 있으면서 심장이나 어깨, 목의 긴장을 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내면의 공간으로 흐르는 생명의 파장,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평화의 파장에 의식이 귀의(歸依)합니다. 의식을 그 파장에 맞춰주면서 존재적 상태를 가만히 듣고 있는 상태로 있어봅니다(吟味). 그러면 마음이 생각으로 이탈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을 명상해야 합니다.

물론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의식과 심장(心波)을 통일시켜주고 있는 상태가 가장 건강한 상태입니다. 이 때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됩니다. 그 상태에서 뇌파 자체가 고도로 명징해지는 상태로 진입하면 더욱더 좋겠지요. 그것은 어떻게 오느냐? 우리의 두뇌 안에는 진을 치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이 있고 우리의 의식이 생각들을 따라다니느라 바쁜데 이런 복잡하고 거친 생각들은 목뒤를 긴장시키고 심장을 조여들게 합니다. 의식을 목뒤로 보내서 이완해주고 다시 심장으로 의식을 보내서 심장까지 이완해주면 기본적으로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명징성(자각력)은 뇌파가 변형될 때 옵니다. 뇌파를 떨어뜨리고 안정시키는 것 중 호흡법의 일종인 중호흡(양코호흡)법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한쪽 콧구멍만 열려 있지만 양코가 동시에 열려 있을 때에는 의식이 선명하고 명징해집니다. 그러면서 뇌파가 변하고 잡생각이 사라지면서 두뇌 안의 센터들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생각이 툭 떨어집니다. 생각과 의식의 간격이 벌려지는 거지요. 의식이 심장으로 들어오게 되면(귀의하면) 평온함이 유지되다 어느 순간 백회가 열립니다. 백회를 막고 있는 생각들이 떨어지면서 백회와 영안과 심장이 하나의 통로로 일체화되면서 고요하면서 텅비어 있는 상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돌아가고 다시 고요함으로, 이렇게 왔다갔다 하다가 고요한 상태가 더 커지게 되면 나중에는 생각과 무의식까지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생각으로는 이런 상태로 갈 수 없습니다.

도(道)의 맥(脈)은 항상 존재하고 우리의 내면에 늘 흐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생각을 하고 죄를 짓더라도 자아적 측면에서만 근원적 생명의 지혜가 멀고 막혀져 있지 존재 전체 안에는 이것이 항상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괜찮다는 겁니다. 자아는 생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흐름과 멀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존재 안에 우주와 연결된 그 흐름이 변함없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이 진짜 나입니다. 실재의 나는 이것이지만 현상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두뇌가 만들어낸 자아가 일시적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수고 하고 있는 거지요. (중략)


3

우리가 사랑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값진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값진 본질이기 때문에 사랑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형상을 넘어 상대방 속의 근원적 빛과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영원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빛을 만나서 하나가 되도록 하세요. 하나로 녹아드세요. 그러면 알게 됩니다. 삶의 비밀을, 그리고 우주의 비밀마저 당신의 가슴 속에서 뚜렷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울림, 그것이 참사랑입니다. 그러나 욕구나 상처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잃어버립니다. 싸움으로 인해서 상대방의 본질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욕구와 상처를 빼고 보세요. 순수한 열망만으로 우리는 상대방의 본질과 만날 수 있고 상대방의 본질을 만났을 때 그것은 곧 자신의 본질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 그대는 완전한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기억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영원함을 증거해 주는 힘입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예수는 그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러 왔습니다. 에고가 사랑을 만나면 죽게 됩니다. 에고는 그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에고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에고의 욕구와 상처를 비워야 합니다. 그것을 비웠을 때 그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영원성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원성을 깨워줍니다. 단 한 번이라도 참된 사랑을 만난다면 여러분들에게 그 사랑은 영원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 한 순간의 사랑의 발견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영원히 힘든 이 세상을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꼭 그런 사랑을 만날 수 있게 하세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 안에 그것을 볼 수 있는 힘과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눈뜬다면 상대방 속의 빛과 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이것을 봅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형상 너머 상대방 속의 빛과 가능성을 보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가 내게 그랬을 것입니다, 거룩한 이는 온전함을 증거해 주는 자라고. 신은 우리를 부족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신은 우리 가장 내면에 존재하는 에센스를 보아주는 겁니다. 우리는 신의 분신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신이 우리를 봅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에고의 작품일 뿐입니다. 신은 우리 안의 가능성, 에센스를 보아주기 때문에 기독교 성서에서처럼 “보기에 좋았다”라는 표현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엄청난 위대함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를 넘어서 있습니다.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 힘은 빛과 사랑입니다. 눈이 열리면 그것을 알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가되 개인적인 욕구와 상처를 빼고 보면 만날 수 있습니다. 욕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욕구 너머의 차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빼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우주적인 것으로 우리를 지속적으로 키워주는 힘이 됩니다. 실제로 지구가 생명을 키워내는 것도 엄청난 사랑의 힘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키워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주는 거대한 사랑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적 세계 차원을 보면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사랑의 빛이 작용하고 있고, 우리가 형상 너머의 그 세계를 볼 때 우리의 마음에서 갈등과 투쟁이 끝납니다. 형상의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원의 눈을 뜨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고 영원한 우주의 신비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삶은 바로 그런 영원의 눈을 뜬 사람들에게는 천국이고, 뜨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메마른 사막과 같은 세계입니다. 우리가 동시에 그런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세계를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측면에 포커싱하고 어떤 눈을 뜨고 사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유아기를 갓 벗어난 사춘기의 청소년과 같은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전쟁과 갈등, 폭력과 투쟁, 고뇌로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지구적 삶에 간간히 축제가 있고 간간이 휴식이 있습니다. 성자들은 지구가 위대한 신비와 사랑으로 충만한 행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가끔씩 이 세상을 방문합니다. 지혜서와 안내들을 통해 그 문을 열어보여 주지요. 그들은 이 사랑의 역사에 동참하라고 합니다. 일상 공간에서 우리는 사랑 때문에 많은 갈등을 하고 싸우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은 그 어떤 사랑이라도 이 영원한 사랑의 한 반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서 사랑을 느꼈든, 내가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게 사랑을 준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겁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삶은 사막과도 같이 황량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느꼈던 존재들, 나를 사랑했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를 전하세요.

* 위 내용은 한바다님이 진행한 2010년 9월과 10월 메인세션 기간 중의 메시지를 녹취, 발췌한 것입니다.

아난다 이야기

아난다 이야기


한바다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 행함에서 정신의 힘은 길러진다. 붓다의 가장 총애를 받은 제자이자 그의 사촌 동생이었던 아난다는 붓다가 행한 설법을 줄줄 꿰맬 정도로 외우고 다녔지만 정작 붓다가 생존해 있을 때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총명한 기억력과 빼어난 미모가 있었지만 붓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마음이 있어서 정신의 힘을 충분히 성숙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붓다의 영적 파워를 흡수한 다음 여러 곳을 다니며 스스로 움직이다 보니 자생력, 즉 정신의 힘이 강인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난다는 늘 붓다 곁에만 있다 보니 자생력을 키울 기회가 없었다. 비록 행복하긴 했겠지만.... 행복에 정신적 자생력까지 곁들여야 완전하다.

아난다는 형님인 붓다가 영원히 살 줄 믿었고 자신의 미래를 다 보장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붓다는 아난다에게 깨달음을 전수해주지 않고 입적해버렸다. 사실 붓다 입장에서 보면 전수해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인정이 많은 붓다로서는 아난다를 강하게 밀어부치지 못했던 것이리라. 아무리 붓다라 해도 친척이라는 인연은 짙었던 것이다.

이처럼 붓다가 가버리자 뒤에 남은 아난다는 왜 붓다가 살아있을 때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가 하는 분통한 마음과 함께 심한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붓다의 말씀만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는 카샤파가 주관하는 경전 결집회의에 참석하려고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러나 카샤파는 깨닫지도 못한 사람은 경전 결집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문을 매정하게 걸어 잠가버렸다. 이에 분개한 아난다는 신통력으로 문을 뚫고 들어가려 했으나 웬일인지 신통도 통하지 않았다 한다. 이는 신통력보다 깨달음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다.

절통하고 분한 마음에 아난다는 절간 밖에서 깨금발을 하고서 내가 깨닫기 전에는 결코 이 자세를 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참으로 절실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한 나절이 다 갈 무렵 카샤파는 절 밖에서 여전히 깨금질을 하고 있는 아난다를 보고는 감동되었다. 아난다는 카샤파를 보고 간절히 물었다.

“사형님, 전에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비밀리에 전한 법이 무엇이오니까?”
이에 카샤파는 결정적인 힌트를 던져 주었다.
“어이 아난다. 기특하군, 저 절문 앞에 있는 찰간대를 꺾어 버리게.”

찰간대란 절 바깥에 있는 국기봉 같은 깃발을 꽂는 대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난다는 퍼뜩 불법을 깨쳤다고 한다.

8.26.2010

Morning Prayer

O Heaven!
Waken us into the eternal source of happiness and peace, transcedent over all sadness and fear.
Show us the path to the eternal truth transcendent over illusion and dream.
Manifest Your true form: You, the Source of all life,
May Your intention become ours.
May we witness Your Divine presence in very flower and in every stage of life.
All living beings are wonderful because Your sweet breath is in them.
May we participate and bathe in that mystery of life.
Now we offer everything to You.
Please awaken our hearts into Your mysterious Dharma.
Endow us with wisdom and Your eternal blessing and beatific silence.
Show us the door to happiness and peace.
My everlasting purpose of life is to find Your love in everything,
O Heaven.

Message of Hanbada , The Enlightened Master

HAPPY YOGA THEORY

The Process.

We do each pose 3 times.
The first is a kind of warm up to prepare, steady and

soften the body. It should be simple, easy and gentle.

The second time is to develop awareness of the process

through focus on the movement. It creates a kind of space

in your mind. You should do it with some generosity or love

for yourself.

The third you do with wholeheartedness. It builds will

power to break through your limitations. The idea

cannot go further is stored in your nerves and muscles.

To expand your mind and consciousness and go past that

boundary is to develop will. Finally you let go of the

tension that creates those limitations.




1. Build strength

2. Build awareness

3. Build will power




We start with simple postures and it builds on itself

through the creation and expansion stages. There is no need

to strive for perfect posture. The main thing is to relax

and enjoy the flow and be aware of the process.







Key Concept




You are already enough to become happy so let your happiness

flow in you. You focus on the process and by accepting this

truth you feel peace Right Now. Understanding this is

easy; but you need the postures to experience it.







Spirit/ Essence




1. Prepare for and do everything as effortlessly as

possible.

2. Do it with some generosity or love for yourself

3. Do it wholeheartedly.

Vision of Happy Tao

What is the contribution of Happy Tao to the world, to you?
It’s a simple but dynamic approach to your life; not a religion, not an intellectual philosophy, nor a dogma. It is just a way of life - TAO.
Your spiritual transformation arises suddenly through Happy Tao. The art of “metanoia” is the enlightenment, the Kkedarum (in Korean language), an awakening of the true self.
We tend to rely on the image world, processed by our illusory mind, which creates a duality: You and me, High and low, Body and soul. But all these dualities are nothing but mental projections of your illusory mind. We have the illusion of living in an objective and logical way. Such is not the case.  Thus, we live in a dreamy and unfulfilling world; such an extremely monotonous life.
Life is illogical. That illogicality is the beauty and immensity of life. Beyond the illusory mind, there is a higher logic and prospective. If you solve the Kong-An (catechetic questions for Buddhist meditation) you will have a fresh perspective - dharma eye. You can experience a quite different world through different perspectives. The Source blossoms within you, and you become the Source. The bud blossoms into its true form. This is metanoia - Kkedarum.
The vision of Happy Tao is to bring a sudden metanoia – a radical shift of your life paradigm; a shift from the past to the present, from a fragmented realization to a full awakening, from the hidden to a revelation.
The messages of Happy Tao are summed up in three phrases:
·        Be the master of your own life.
·        Be open to the situation.
·        Respond from the source.
Being the master of your own life means to follow your true nature; to be fully responsible for yourself, your actions, and personal growth. Do not be misguided by social bias.
To be open to the situation means to be fully present here and now, to wholly commit.
To respond from the source means to naturally and compassionately respond to the calling of the situation. Every situation is an opportunity to grow towards your true nature, when you approach it properly with the right attitude.
Seeming barriers to being the master of your own life, are holding on to the artificial image of oneself, and being dependent too much on social values and expectations.
The barrier to being open to the situation is a fragmented commitment, caused by being stuck in emotions and trapped in thoughts.
The barrier to responding from the source, is acting mechanically, patterned and with programmed reactions.
 
The result of metanoia is the spontaneous blossoming of your true nature, where you can enjoy the your full potential, in a life of compassionate awareness. You have traveled such a long way to find this. You have yearned to reach this point. That elusive thing, which you are always longing for, yearning for, will become clear, vivid and alive in you.

Why HappyTao?

The Wonder of Life

Why 'Happy Tao'?
The world is now undergoing a period of rapid transformation. What was once taken for granted is no longer true. Blindly following tradition therefore is sometimes harmful and limiting both to humans and to the environment. It seems that Humanity has blindly and mindlessly followed obsolete paths into extreme danger. Hence we are in dire need of collective as well as individual growth. If you are aware of the intensity and urgency of our era, and if you have the wisdom tomake this situation an opportunity for your Spiritual Awakening you will strive to attain radical transformation of your entire being. All those who stagnate and linger in the old paradigm will experience great anxiety and fear.. Form them nothing seems to be safe.

Though scientific discovery and worldwide development of technology and computer networks, our definition of reality is changing. We are at the door of a completely new version of reality. In this reality the world is no longer a separate entity or object, but a dynamic process which appears in the mirror of our consciousness. Therefore we cannot judge outside objects from a static, egoistic point of view; we human beings are not isolated individual beings, we are an interdependent part of the whole. You and I and the whole world are one organic life system.

You are an organic part of the life system and that system is living in you. Your transformation benefits not only you but the entire world. The division of 'In' and 'Out' is just an illusion projected by the ego mind. We must awaken to the fact that we have the responsibility and the capacity to change the fate of the world. Because everything is interconnected and interdependent; both influencing and being influenced by every other thing. This is the fundamental nature of the life system we are in. Hence it is vitally important for each of us to actively work towards self development.

We are responsible for our own thought and work. We are not just outside observers but active participants so we have our own contributions to make to the world. That kind of contribution can be facilitated by our own spiritual development and growth.

Happiness is our natural state. It spontaneously blossoms when we realize our own True Self and we understand that the True Self is a permanent source of happiness. Your only capital. True happiness cannot be taken or lost when your are firmly rooted in your True Self. Happiness is our birthright. Furthermore, it is our divine duty to remain happy because happiness resonates and is reflected outside as compassion and kindness. It echoes back.

We are all born with that seed of happiness in us. We are all endowed with the noble and precious nature that can flower as blissful perfection. The purpose of life is to discover that seed of bliss and let it blossom and spread its sweet fragrance all around.

This integration of our being is called Han, or Wholeness. Happy Taog guides you on this inner journey to uncover your True Self. The state of Han is expressed as integration of the individual with the worl; time with space; past with present and future; vision with reality; heart with mind, etc.

6.16.2010

마음이 있어야 할 자리(한바다)

명상에 대한 정의는 참 많습니다. 나 역시 명상이란 무엇인가 얘기할 때마다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명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청중]
“명상은 쉬는 것, 자기이해, 그리고 자기치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앎으로써 그 움직임을 그치고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명상입니다.”
“의식을 고요히 하여 의식이 왔던 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위빠사나에서는 명상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는 말은 쉬운데 또 실제로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는데, 어디로 돌아오라는 말입니까? 지금 ‘지금 이 순간’은 ‘지금 이 순간’ 하는 순간 이미 지나가고 없습니다. (농담입니다, 하하.)

명상은 마음이 본래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머물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는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그러나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면 항상 무언가 걸리고 괴롭습니다.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신호인 거지요. 명상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이것을 위한 많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어떤 분이 말한 치유와 자기이해 역시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 중의 현상입니다. 쉬는 것은 마음이 제자리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해도 안 쉬어집니다.

[청중]
“마음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트릭입니다. 깨어서 대답하세요. “마음이 주인입니까, 몸이 주인입니까?” 선가禪家에서의 방법입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라고 물으면 이것인지 저것인지로 정의해야 하죠? 마음이 주인이라고 해도 방망이요, 몸이 주인이라고 해도 방망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그때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한다면 ‘그게 명상이다’라고 할 겁니다. 선사禪師들은 결론은 내려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가의 방식입니다. 스스로 느끼고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스승이 어떤 정의를 내려준다면 여러분들은 그 정의에 매이게 되고 그것을 따라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만나져야 하는데 자꾸 어긋나게 됩니다. 그것이 언어도단言語道斷 현상입니다. 하느님을 글로 적어놓는다 합시다. 그 순간부터 글로 적어놓은 하느님, 또는 예수가 정의한 하느님, 부처가 정의한 하느님이 원래의 하느님을 대신하게 됩니다. 자기가 만난 하느님이 나와줘야 합니다. 자기가 자유로워져야 하고, 자기가 독립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주인이냐 몸이 주인이냐 할 때, 마음도 주인이 아니고 몸도 주인이 아니고, 마음도 몸도 손님입니다. 손님을 한자로 봅시다. 손님 ‘客’은 갓머리(house)에 각기 ‘各’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발과 함께 입(口)이 집으로 온 것을 형상화한 형성글자입니다. 마음은 늘 왔다 갔다 합니다. 다리도 없는 것이 빛의 속도로. (웃음) 몸은 왔다갔다는 안 하는데 입만 들고 있어서 계속 먹여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괴롭힙니다. 몸은 또한 죽을 때 남겨두고 떠납니다. 주인이 아니라는 거죠. 주인은 실제로 안 보입니다. 명상의 목적은 마음도 몸도 주인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겁니다. 이게 제자리에 있는 겁니다. 거꾸로 되면 혼동이 오면서 내가 주인인데 종이 돼 있습니다. 몸에서 불편함이나 아픔이 생겼다, 마음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 누군가가 밉다 이럴 때, 몸과 마음이 주인이라면 ‘저 사람이 밉다’는 것이 사실로 되어 버립니다. 마음이‘저 사람은 분명히 잘못된 놈이야’라고 규정을 지으면 나는 ‘그래 맞아’ 하면서 내 마음이 만들어낸 그것에 끄달리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같이 일할 때 많이 일어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참 좋았더라’에서 ‘원수더라’, 그러다가 헤어지면 외로워지기 시작하면서 ‘그때가 좋았다, 그립다’로 됩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나’ 하고 자학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것이 마음의 속성일 뿐입니다. 객客이 그러고 있습니다.

명상의 목적이 고귀한 것은 주인이 무엇인지 바로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걸쳐 손님 접대만 하다 끝나면 어떻겠습니까? 자신도 모르고 결국 귀신 섬기면서 산 셈이니 얼마나 허탈하겠어요? 마음이 제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은 마음과 몸이 나의 주체(본질)가 아니라 내가 쓰는 용用이 되고 진정한 나(본질, 본체)가 주인이 된다는 겁니다. 명상은 근본적인 나를 찾는 것인데, 근본적인 나(體)가 따로 있더라는 겁니다. 몸과 마음은 내가 삶을 운영하기 위해서 우주로부터 빌려온 하나의 필요도구일 뿐이더라는 겁니다. 살(土)도 혈액(水)도 빌려온 것입니다. 빌려온 것이니 죽을 때 돌려주는 것이지요. 살아 있는 동안 몸을 잘 보살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겁니다. 몸이야 죽으면 놓고 가지만 마음은 죽고 나서도 따라다닙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마치 로켓이 발사되듯이 육체를 벗어납니다. 육체를 벗어나면 참 편하고 좋은데, 조금 있다 보면 너덜거리는 다른 몸이 또 있습니다. 소멸되지 않은 마음이 붙어 있는 거지요.

명상의 목적은 가장 본질적인 몸과 마음의 근원을 아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명상은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 맞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주인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주인의 자리를 찾으면 몸과 마음이 빛이 납니다. 그렇지 못하면 불안한 몸과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주인의 자리를 찾으면 자유로워지면서 밝아집니다. 그 주인의 자리가 바로 진리와 하나 되는 자리입니다. 우리 내부에 진리와 하나 되는 자리(우리에게 그런 인자因子가 존재합니다)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그 자리를 찾아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마음은 100%의 주인이 아니고, 거기에 정보가 들어가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생각이 멎은 자리에 진짜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생각이 객이고, 생각이 멎은 자리에 주인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늘 ‘天’ 자는 큰 ‘大’(사람), 몸과 마음이 본체(一, 몸과 마음의 주인인 자리)와 교류하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정수리로 몸과 마음이 하나 된 자리의 기운이 들어오는데, 마음이 이 자리에 포커싱돼 있을 때는 괴로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한 어리석지 않고 밝습니다. 마음이 이 자리를 이탈해 돌아다닐 때는 그때부터 흙탕물을 일으킵니다. (중략)

우리의 의식체 안에는 무형의 마음이라는 창고(디렉토리)가 있는데 이 안에 수많은 정보들(정보망)이 들어가 있습니다. 나라는 의식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매우 정교한 우주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 자체는 마치 인터넷망과 같은 기억(정보)의 바다입니다. 자신이 느꼈거나 경험했던 모든 것이 기록이 돼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고도로 압축된 정보의 파일입니다. 우리 몸의 유전자 안에는 공룡시대 기억까지 담겨 있습니다. 심지어는 원자, 분자 시절의 기억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이런 기억입니다. 이 기억과 기억끼리 서로 충돌하는 것이 갈등이고 기억과 기억 간에 모순이 없으면 평화로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를 경우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기억들이 나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기억이 나라고 붙잡고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안다고 할 때, 그 앎의 과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각(sensation)적인앎(perception)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인지認知(recognition)적 앎이죠.] 그 정보에는 먼저 나의 개체적인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부모의 기억, 조상의 기억, 전생의 기억, 미래의 기억(미래에 올 파동을 미리 기록해 놓은 것, 예지豫言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 기억들이라는 것이 앞에서 말했듯이 어릴 때 상처받은 경험의 기억(나의 업), 부모의 기억, 어릴 때는 몸이 유연한데 그때 흡수되어 차크라에 기록된 부모의 기억(부모의 습관까지 배어듦), 그리고 조상의 기억(조상의 업, 원거리에서 파이프로 연결된 에너지로 이유도 모르고 괴로움에 휩싸일 때가 있음), 또 상처의 기억도 없는데 괴로운 경우, 나의 에너지장 안에 뭉쳐져 있는 전생의 입자 때문일 경우가 많은데 그 전생의 업,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렇게 해서 괴로움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쓰고 냈던 마음들이 없어지지 않고 전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몸과 마음의 수많은 정보들을 바로잡아서 혼란스런 파동이 아닌 상태, 스스로 조화로운 상태로 균형을 맞추고, 내가 그 방대한 세계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된 자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제자리로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이나 감정을 초월해야 합니다.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을 전부 부정해버리는 방법입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따라가지 않고 무시하고 놔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극도의 고통이 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묶여 있던 어떤 것이 툭 떨어져 나가면서 변형이 일어납니다. 나의 의식이 마음에서 마음이 아닌 자리로 이동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해방된 체험을 공空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깨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깨친 거지요. 이렇듯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가는 이 방법은 마음을 뚫고 지나가는 정공법입니다. 이것을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이것이 결국 마음공부입니다. 이 길은 설명으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이나 욕망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것이 내가 아님을 알고 초연하게 그것들을 바라봄으로써 에고적 힘이 약화되면서 제자리로 가버려요. 그 중간에는 엄청난 괴로움이 옵니다. 원래 있었던 것이 올라오는 거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툭 떨어져나갈 때 자유로움을 맛봅니다. 이것을 ‘한 번 보았다’, ‘초견성했다’ 합니다. 의식이 있다고 할 때의 의식은 일반적인 의식이 아니고 자각하는 의식, 깨어 있는 의식을 말합니다. ‘의식이 깨어 있다’ 함은 생각이나 감정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의 의식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의식이 명상으로 갈 때 본질로 가는 겁니다. 해방이 일어나는 거죠. 깨어 있지 못하다는 것은 내가 생각이나 감정에 빠져 있다는 것, 생각이나 감정에 딱 붙어(동일시되어) 그것이 옳다고 전적으로 믿고 끌려다니고 있는 의식상태를 말합니다. 그때의 그 사람은 꿈 속에 있는 겁니다. 꿈 속에 있으면 내내 두들겨 맞습니다. 바깥에서 괴롭혀준 사람이 나타나는 거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질 때 바깥사람에게 원망을 투사합니다. 사실은 그게 착각입니다. 여러분들은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온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 모든 사람은 나의 거울이자 나를 일깨우기 위한 스승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이 공부를 하는 길에서 두 종류의 스승이 있는데, 한 스승은 온전한 길로 안내해 주고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스승이 있습니다. 또 다른 스승은 자신을 괴롭혀주는 스승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깨치기 위해서는 두 스승이 다 필요합니다. 나 같은 스승은 여러분을 보호해주지만, 여러분들이 고도로 정밀하게 준비돼 있지 않으면 깨치게 해주지 않습니다. 그 전에 깨치게 해주려고 하면 여러분들과 나는 원수가 됩니다. 나는 여러분 안에 있는 적敵을 끄집어내야 되거든. 그게 바로 탄트릭 마스터의 원래적 역할입니다, 섹스 탄트릭이 아니라. 탄트릭 마스터는 여러분 안에 있는 에고 덩어리(원수)를 끄집어내 주는 마스터입니다. 지금은 바깥에 너무 많은 스승들이 있으므로 스승들이 이것을 잘 안 하죠. 바깥에서 괴롭혀주는 스승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까지 그러면 여러분들이 갈 자리가 없잖아. 그래서 나는 그 역할을 안 합니다. 여러분들의 때가 되면 여러분들을 엄청나게 괴롭히는 스승이 나타나 아주 심하게 여러분들의 에고를 건드려 줍니다. 여러분들의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들의 의식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때 이 공식을 알면 버팁니다. 공식을 모르고 있으면 ‘네가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어, 그러고도 친구야?’ 하고 흥분하여 욕설도 해대고 할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이 공식을 알고 있으면 공부가 됩니다. 아무튼 어느 누군가가 여러분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서 은총을 베푼다면 그때 여러분들은 그 바깥의 대상의 행위와 말과는 상관없이 단지 움직이는 그대의 마음만 보면 됩니다. 이것이 자각입니다. 자각이 뭐라고 했습니까? 첫째 자각은 생각이나 감정에 내가 휩쓸리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 자각을 놓치잖아요? 그때 다시 나를 돌이켜보는 것, 이것이 회광반조, 또 다른 자각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격이 성숙됩니다. 인격의 성숙은 결과적으로 대조화와 화합으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깨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얻을 결론은 풍요와 행복의 추수입니다.

내가 왜 주인이 돼야 합니까? 주인(主)이 된다는 것은, 손님(客)이 든 집에 내가(眞我) 자각의 불꽃(자각의 빛)으로 안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여자들은 비녀를 꽂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일제 식민지 시절 단발령에 반대한 많은 유림들이 왜 그리 목숨 걸고 반대했을까요? 상투는 어른이 되면서부터 틀기 시작하는데, 상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상징적 표식으로서 바로, 주인된 자리, 본질의 자리와 연결된 표식이었습니다. 상투를 정수리에 트는 것은 백회로 내려오는 하느님과의 소통하는 자리, 내가 근원적인 주인과 연결되어 내가 주인이자 동시에 종이면서 진리와 소통하는 자리, 그 자리를 상기하고 인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전통은 우리 민족이 상고시대로부터 간직해온 영적, 정신적 표식인데 그것을 잘라버리라고 하니 그리 반대를 했던 겁니다. 상투의 뜻은 뭡니까? 불꽃, 즉 진리와 하나 되게 하는 힘이면서 생명의 빛, 자각의 빛입니다. 그 자각의 불꽃을 갖고 살라는 뜻에서 상투를 틀었던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른은 ‘자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나의 스승으로 삼으면서 나로 돌이킬 때, 내가 주인된 자리로 돌아가고자 강력하게 염원하고 발심할 때, 우리의 상투끈(하늘과 연결되는 안테나)으로부터 오는 중심의 기운이 교교하게 살아납니다. 살아나면서 내가 고통스럽고 문제 삼았던 것, 미워했던 대상이 순간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상태로 전환이 돼버립니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내가 현재 고통스럽고 누군가가 밉다면 그 상태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내 자리에 있지 않구나, 내가 자각의 불꽃을 세우지 않고 있구나’ 하는 표시일 따름입니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자학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내가 그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강하게 발심하면 됩니다. 그런 순간에 존재 중심의 힘이 깨어나면서 어느 순간에 ‘이거 아무 것도 아니잖아’ 하게 됩니다. 즉, 꿈이었구나 하는 것을 절절하게 알게 되는 거죠. 우리가 깨칠 수 있는 것은 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인 주主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뜻을 알고 명상을 합시다.

이 내용은 2010년 1월 메인세션에서 한바다님이 행하신 강의를 녹취, 발췌한 것입니다.

5.31.2010

본성의 빛

본성의 투명한 빛과 영원의 우주생명과 만나는 지점을 생각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스스로 순결한 진실과 지극한 정성으로 찾아내는 것이 본성계합도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로 쓰면 투명하고 밝은 본성과 마음을 만나게 되는데 어떤 마음과 생각이 문을 막고, 또 열어주는지 그 차이를 명확하게 투철하게 자각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본성의 빛, 그리스도의 빛, 또한 법신이라는 이 우주생명은 모든 마음과 생각이 사라진 통빈 공간에서 스스로 현출한다. 그것과 만나 내 자신이 그것임을 여실히 자각하고 그 은총에 자신을 맡겨 그 흐름이 자신의 축에 속에 내려옴을 허용할 때 은총의 강물이 모든 카르마와 업장을 씻어주는 것이다. 우주생명이 나의 육체생명과 만났을 때 육체가 갱생되며 세포와 피부에 빛이 난다.




삶은 이 본성의 빛을 펼치는 기쁨의 장인 것이다. 이것을 보는 것이 지혜이다.

이 투명한 본성의 빛을 가슴을 통해 표현할 때 오전한 사랑이 꽃피어 나 가슴이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가슴열림은 남녀관계의 에로틱으로 열린 사랑과는 다르다.




가슴열림은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여 온전한 사랑이 진인을 낳는다. 그러므로 늘 본성의 빛이 내려온 상태의 가슴의 화락한 밝음을 거울로 삼아 현실과 누리와 만남에 있어 내가 바로 가고 온전한 마음을 쓰고 있음인지 아닌지 비추고 물어보아야 한다.




그 외 영안이나 눈으로 본 것은 카르마, 주관이 투영된 것이므로 허상이고 착각일 뿐이다.



이 본성의 빛을 큰 축으로 삼아

이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개성 즉 육체 속이 이미 내장된 영혼의 목적(원카르마)을 삶속에 꽃피우는 것이 중도이다.




삶은 본성의 빛, 그 이끔을 나의 생명을 통해 터득하고 각자 주체적으로 꽃피우는 기회인 것이다.

그 사이에 끼어든 방해파동을 카르마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조화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주입된 허상적 현실이다




본성의 빛을 깨달은 이에게는 이원적 체험이 사라진다.

나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체험은 사라지고 대신 본래 빛의 은은한 비추임만이 지고의 진실이 된다.

그러므로 진리의 추구자여, 허망하고 삿된 체험을 추구하여 생명력을 유실시키고 에너지를 소모시켜 삶을 낭비하지 말아라.




진정한 체험은 본성의 빛이 더욱 은은해지고 깊어지며 지극해지는 일이다.

그것이 현묘지도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현묘지도에 들어간다,




모두 지극한 삶에의 참여와 진실에의 감응을 통해 더욱 깊어지며 익어지는 일이 정수이니라.

무조건적인 사랑

이유도 원인도 없는 빛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피어나 내 존재를 감싸며 누리를 흘러퍼진다.

진정한 사랑은 이유도 조건도 없다.




우리는 원래 사랑이었다.

우리는 사랑이란 빛깔의 영혼들이다.

진정한 사랑은 대가도 없으며 상대방에 의해 굴절되지 않고 상황에 의해 변하지도 않는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신이란 바로 온전하고 해맑은 사랑,

그것이었다.



처음 명상을 배웠을 때 신은 온전한 사랑의 빛깔로 나를 깨웠다.

신의 사랑은 온통 은총이었고 나는 그것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함뿐이었다.




그 사랑은 내 가슴을 살아나게 했고 살아난 가슴이 느끼는 가장 진실한 것은

바로 이 온전한 사랑이었다.




나는 그 진실을 따라 그 진실이 인도하는 대로 기꺼이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서 구도란 바로 진실을 따라 가는 삶 자체일 뿐이었다.




그런 삶의 여정 중에 신은 삶의 스승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 분은 가장 인간적인 분이었지만 그가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배후에는

세상의 어떤 성자들도 흉내낼 수 없는 푸근함과 따스함이 있었다.

그는 오직 사랑으로 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유보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사랑의 힘을 지닌 존재였다.




나의 삶에서 이처럼 나는 사랑을 거저 받았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어떤 형태로 돌려줄 수 있을까?

단지 내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다시 돌려줄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우리 몸 중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부위는 가슴이다.

가슴이 열리면 무조건적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남녀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그 무조건적인 사랑의 한 메아리일 뿐이다.

그런 사랑엔 항상 유보조건이 따르며 기대치가 따른다.

온전한 사랑은 그런 유보조건이나 기대치가 없다.

그런 사랑만이 진정 평화로우며 자유로운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랑 속엔 그런 평화와 자유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육체를 가진 유한한 존재로 사랑의 대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사랑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질투, 불안과 허무는 바로 그런 유한성의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으로 움직여라.

사랑을 주지 말고 그냥 사랑이 되어 움직여라.

분열됨이 없이 전적인 존재가 되어 전적으로 움직여라.

그러면 당신의 가슴이 무조건적인 사랑의 세계를 향해 열릴 것이다.



당신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

당신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길은 바로 그렇게 움직일 때이다.

명상

명상이란,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것을 깊고 알차게 해주는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만물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대하는 마음이다.

인간의 육체에는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장치가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하는 작용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불순한 기운과 의도 경험, 의견, 생각을 비워내준다.

그리하여 그 빔(空) 속에 새롭고 신선한 신의 공기, 생명의 소리가 들어올 수 있게 해준다.




있는 그대로 들어라

오직 순수하게 들어라

처음으로 지혜의 샘물을 맛보리라



이 길에서 명상이란, 늘 새로이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자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대에게 영원한 기쁨이 머물지니..

남을 비난하고 싶을 때 돌이켜서 자신의 마음을 보라

자신을 비난하고 싶을 때 돌이켜서 마음을 보라 욕망이 일어날 때 돌이켜서 자신의 마음을 보라

욕망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정지하라 저항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정지하라

그대에게 온전한 창화의 공간이 깃들지니




빛나는 가슴을 지닌 이여

우주는 생명소로 충만해있다

그윽한 침묵 속에서 생명소를 만나라

존재 전체를 생명으로 가득 채워라



그대 고동치는 가슴의 맥박과 호흡 속에 빛살처럼 물결치는 생명의 정수가 흐르고 있네

숨결의 리듬 속에 발의 움직임을 태워라 기운의 호흡 속에 너 자신마저 사라질 것이다.



숨과 마음은 하나이다.

숨이 거칠어지면 마음으로 숨을 고르고 마음이 산란해지면 숨결로 이를 고르라

그대 생명의 중심에 뿌리내릴 것이다.




이완이란, 도(道)에 자신의 맡김이다.

부드러이 호흡을 느껴라 몸무게를 느껴라

대지의 접촉지점을 느껴라 맡겨라

모든 걱정을 버리고 자신마저 잊어라

대지가 받쳐주는 이 푸근함 속으로 들어가라




나 잘났다는 생각은 불화를 일으킬 뿐이다.

나 못났다는 생각도 불행을 불러올 뿐이다.

양극단을 버리고 고요한 중심의 자리에 머물러라.

하늘의 덕이 그대에게 깃들지니




가장 위대한 훈련은 현재에 존재하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다.

머리의 저항을 제로로 하고 다만 접촉의 느낌과 함께 있으라 아무 것도 덧붙이지 말라

그리하여 순수 체험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라 미래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순간만이 최고의 삶이다



이 순간을 영원으로 살아라



밥을 먹을 때 음미하라

마지막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씹어라

밥 그 자체가 되어라

맛 그 자체가 되어라




호흡 속으로 들어가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작을 내려놓고 홀로 춤 속으로 들어가라

우주가 춤추게 하라

그대가 사라진 곳에는 우주적 아름다움이 꽃피어난다



모든 선입견과 지식을 놓아버려라

가치관에 상관없이 움직여라

오직 행할 수 있는 힘 그것만이 그대의 것이다.

감미로운 창화의 세계가 그대 앞에 펼쳐질 것이다.



고통이 일어났을 때 머리로 도망가지 말아라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라

고요! 경험의 한가운데서 자비가 꽃피어난다

먹거리와 생명문화

옛 도가 경전에 음부경이란 유명한 경전이 있다.







음부경은 중국 한의학의 시조로 알려진 황제란 현인 왕에게 도를 전한 자부 선생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 음부경에 이르기를, 도(道)는 도(thief)라 했다. 즉 진리라는 것은 훔치는 것이라는 말이다.







얼른 들으면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일까 생각이 들 것이다.



하늘은 땅 기운을 훔치고 땅은 하늘을 훔치고 사람은 하늘을 훔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엄청나게 잔인한 말 같지만 가만히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맞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타 생명체나 유기체의 에너지를 흡수해야만 종족보전의 성스런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고상한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더라도 우리가 개별적 유기체를 유지해야 하는 생존의 고리 안에 들어 있는 한



우리는 남의 에너지를 먹어야 한다.



이것은 엄연한 실존의 사실이며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비정한 우주의 법칙인 것이다.



우리가 남의 기운을 먹는 것은 잔혹한 일이지만 우주 그 자체를 한 단위의 생명으로 볼 때



자기 에너지 교환을 통해 우주가 영생하는 메카니즘에 불과하다.



부처는 이것을 윤회의 괴로움으로 파악하고 이 생사의 고리를 끊는 법칙을 윤회하는 인간들에게 제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해탈은 윤회의 최종착이며 우리가 진화해 나가는 최종점이라 할 수 있다.







진화를 이루기위해서는 높은 에너지를 많이 섭취해야 한다.



즉 고급기운을 많이 흡수하고 그것을 유기체 안에 재생산하는 만큼 진화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먹거리는 기운이다.



생명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순환은 곧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본능이다.



생존하고 진화하기 위해서... 먹거리는 진동하고 있다.



그대의 생명은 먹거리를 향하여 흐르고 있다.



어떤 먹거리가 그대의 진화를 도우며 그대에게 건강하고 활력찬 에너지를 보장해 주는가?







먹거리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생존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주식으로 삼는 것들이다.



이것은 늘 먹어야 하는 것들이다. 곡류와 채소와 고기들이다.







둘째, 치유를 위한 음식이다.



우리의 인체에 어떤 특정한 영양분이나 기운이 편중되어 있거나 부족할 때 금하거나 듬뿍 섭취해야 되는 것들이다.



실연했을 때 단 음식을 먹는다.



실연했을 때는 내부가 공허하고 결핍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단음식으로 영양을 공급하며



동시에 감정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다.



슬플 때에는 매운탕을 먹으라. 슬플 때에는 기운이 폐에 응체되고 울적하기 때문에 매운 기운으로



이를 흩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감정이 메마름을 느낄 때는 어떤 음식이 좋을까?



감정이 메마른 것은 습기와 수기의 부족 때문이다. 윤활유 부족이다.



삼겹살을 많이 구워 잡수시라. 그럼 화가 날 때에는?







셋째, 진화를 위한 것이다.



진화는 생존이 보장되고 치유가 되어 에너지 누수가 없을 때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생존이 보장되지 않고 치유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진화는 가능하다.



그러나 기름이 부족한 상태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 오르는 비행기 조종사를 현명하다 할 수 있을까.



조만간 그 비행기는 공중에서 폭파하기 마련이다.









영적인 진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오직 법칙 속에만 진화할 수 있다.



자연법칙을 어기면 곧 자연에 보복받기 마련이다.



생존이 보장되고 치유가 되었을 때 우리는 진화를 달성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진화를 위한 음식은 어떤 것일까? 채식?



나는 무모한 채식으로 오히려 신경증에 걸리고 위장에 탈이 난 구도자를 나무도 많이 목격하였다.



자연법칙은 냉혹하고도 자비롭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채식을 하더라도 자신이 냉한 체질 사람들이 채식을 계속 감행해보라.



어떤 결과에 봉착할까?



음기가 몸에 적체되어 결과적으로 체질이 음성화되고 성격이 음울해졌을 때도 계속 영적인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



채식에 성공한 사람들은 열체질이다. 나는 육식을 찬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냉체질 구도자들은 우선 따스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약간의 육식과 생강 등이 필요하다.







생존과 힐링을 위해. 진화를 위해 채식은 바람직하다.



동물성 먹거리 속에는 동물의 상념이 잔존해 있다. 특히 개와 뱀은 절대적 금기이다.



개는 단백질의 구조가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에 가장 인체에 잘 흡수된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폐결핵이 걸리면 개고기를 많이 먹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해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인들에게만 가능하다.



구도자들은 절대적으로 금해야 한다. 개고기를 먹고 죽은 스님들도 많다.



특히 불교를 깊이 신앙하는 사람들 중에 개고기를 먹고 나서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사업에서 까닭 없이 망하는 경우가 많다.



그 까닭은? 미신인가? 아니다.



개는 사람과 너무나 영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상념을 가장 많이 흡수하는 게 이 개 족이다.



개 족들이 가장 애용하는 인성은 우정과 충성, 분노와 슬픔이다.



당신이 개를 잡아 먹을 때 당신은 바로 인간을 먹는 것이다.



개들의 상념은 상상외로 진하고 집요하다. 즉 먹으면 인체에 오래 빙의 된다.



특히 당신이 만일 백회가 열렸거나 쿤달리니로 가슴이 열렸다고 한다면



당신의 영체는 숨이 막힘을 느끼게 되고 열렸던 모든 회로는 폐쇄된다.



그리고 가슴은 덜렁덜렁하고 괜시리 비애와 분노가 교차한다.



개의 원한이 붙은 상념이다. 뱀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사악한 에너지에 빙의된다고 상상해보라.









각설하고.. 진화를 위한 음식은 선도에서 많이 개발되었다.



정신을 맑히면서도 몸 안의 밧데리에 해당하는 신장 기운을 북돋울 수 있는 약들이다.



백복령, 숙지황...



특히 컴퓨터를 많이 하는 분들은 신기가 빨리 고갈되기 때문에 숙지황이라는 약을 딴 약들과 함께 장복하면 좋다.



또는 뿌리를 많이 먹으면 좋다.



인도 아유르베다는 진화에 필요한 음식을 사트바라고 한다.



사트바가 든 음식은 채식가 곡류, 바닷말 등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을 어떤 상태에서 만들었냐이다. 정성이 담긴 음식일까?



아니면 행복한 기운이 담긴 것일까?



정성이 담겼더라도 불행한 사람이 만든 음식은 사트바가 없다.



그러므로 행복한 사람이 만든 음식이 가장 좋다.



특히 음식을 기쁨의 상태에서 만든 것이라면..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음식을 축복하며 만들고 먹을 때 당신의 정성을 담아 음식에 축복을 하고 감사하게 먹으라.







영적인 사람이 기쁨의 상태에서 정성을 담은 음식이 최상의 에너지다.

예비삼매

우리 마음은 바깥 사물들에 대해 수많은 생각과 느낌 의견들을 지어내고 그 의미들에 대해 궁금해 하며,



스스로 만족과 회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까닭은 그렇게 인상지어진 마음의 내용들에 꽉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마음이 혼란에 빠진 이유를 바깥 대상으로만 투사하기 때문에



이 속박과 미혹의 혼란된 삶의 고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







붓다는 그것을 일컬어 윤회라고 부르고 인류가 그 미혹에서 빠져 나오는 길을 강력히 제시하였는데,



마음의 그물에서 벗어나 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했다.









어둠에서 빛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미혹에서 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어떤 힘이 이 수많은 유혹을 떨쳐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해방시켜줄 수 있을까?



그것은 발심이다.







스스로 이 갈등과 미혹을 뚫고 참 삶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꿋꿋한 의지와 용기, 붓다는 이 발심의 힘을 사티라고 했다.







사티는 결심, 정신차림, 인내로 이루어지는데, 마음을 깨쳐가는 첫걸음은 발심이다.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분연히 끊고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바로 이것이며,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작용이 고뇌를 만들어냄을 여실히 자각하고 그 덫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발심이 되었으면 이제 대상에 묶여져 있던 나의 주시력을 내부로 거두어들이는 단계이다.



보통 우리의 의식은 집중이 되지 않으며 산란하고 산만하다.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일초도 쉬지 못하고 뛰어 다니기 때문에 에너지는 모두 소진되며,



이것이 바로 스트레스의 주원인이다.







이런 산란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집중하고 외부에 고착된 생각을 풀어 자유롭게 만드는 과정이 마음을 닦는 수심이다.







수심은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대에게 제공하며, 수심의 목적은 산란한 마음을 집중하고



고뇌에 고착된 주시력을 자유롭게 거두어들이는데 있다.







1.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 앞에 차분히 모은다.







2. 가슴에 집중한 채 차분히 울려오는 느낌에 주의력을 모은다.



무엇을 느끼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



다만 주의력을 양손과 가슴에 모으기만 한다.



3. 고개를 좌우로 세 번씩 부드럽게 돌린다.







4. 반대방향으로 세 번 돌린다.







5. 두 손을 합장한 채 후후하고 길게 내쉰다.







6. 내쉴 때 마음 속의 모든 스트레스를 내뿜는다.



들이마실 때는 의지가 아니라 그냥 들어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호흡하되 주의력만 들숨에 집중한다.



이렇게 세 번 한다.







7.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롭게 되었으면 이제 자기 앞에 있는 어떤 대상을 하나 집중의 대상으로 정하고,



그 대상의 한 지점에다 원을 그리고 그 원 밖을 눈 위로 약간 치켜 보듯 바라본다.



원 바깥을 보면서 이완한다. 이완이 되면 다시 원 안을 보면서 집중한다.



마음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흘려 보내고 원 안에도 주시력을 고정한다.







8. 한참 지나면 의식은 아주 명료해지면서도 생각은 편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이 상태가 되면 그 대상에서 주시력을 거두어 자신의 호흡에다 맞춘다.



주의할 것은 호흡이 아니라 자신의 주시력을 가지런히 차분히 편안히 하는 데 있다.



정신이 더욱 명료해지고 차분해지면 자신의 마음 자체에 주시력을 일치시킨다.









이 방법은 아주 차분하면서도 강력한 집중력을 길러준다.



만일 당신이 마지막 단계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다면



모든 생각이 일시에 떨어져 나가는 대자유, 초월의 경지로 진입할 자격이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예비적 깨달음, 초입 삼매이다.



예비적 깨달음의 과정은 지관이라고 하는 정밀한 마음공부로 들어가게 된다.









발심과 수심 그리고 지관!

해피타오란?

우주생명의 역동적 질서는 곧 타오(TAO, 道)다.



타오는 모든 생명체와 만물에 내재하는 지고지선의 질서이며,



우리 내부에서 타오를 지극히 살펴 그 흐름을 발견하고 그것에 맞추어 몸과 마음과 영혼을 길러내는 것은



스스로 우주생명의 역동적 생명활동과 진화에 동참하는 행위이다.



우리 속에 내재하는 타오를 따라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삶이며,



역대의 모든 성인들이 생을 바쳐 이 인류최고의 의식 상태를 이루길 원해왔다.









지금껏 이러한 삶은 오직 욕망을 억제하고



사회활동으로부터 은퇴하여 고행하는 것으로만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왔었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새로운 비젼이 도래했고,



보다 쉽고 행복한 방식으로 삶속에서 이 타오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길이 소개되고 있다.



이 숨어있는 우주의 이치를 영적인 것에만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에 적극 받아들이고 활용함으로써 스스로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건강과 성공, 인격완성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행복은 타오와 다른 것이 아니며 생명의 근원인 타오는 지고의 기쁨 자체이다.



우리는 보다 행복하게 활동하고 살음으로써 타오에 가까워지고



생명의 근원적 질서인 타오를 구현함으로서 더 큰 행복과 기쁨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우주생명의 근원은 성스런 기쁨, 지고의 조화, 지고의 행복이다.



이러한 타오 즉 생명의 이치를 따라 움직였을 때



마음은 행복이라 번역하고 몸은 쾌감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되며, 영혼은 지고의 사랑과 지혜를 경험하게 된다.



타오는 상대적 인식이나 경험으로는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고,



오직 지극히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 지긋이 내적 생명의 리듬을 살펴 그 오묘한 생성작용에 참여할 때



살아있는 타오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즉 직관지의 도움으로 우리는 타오의 운용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성의 세계에서도 이 타오를 파악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깊은 삶에의 경험과 잘 다듬어진 지성으로



상대성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타오의 작용적인 면을 미루어 짐작하는 방법으로



타오의 드러난 측면 즉 드러난 질서를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타오에 대한 깨달음은 직관적 체험만이 아니라 객관적 이해와 삶에의 참여를 통한 열림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이치를 잘 알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생명을 표현하며



세계와 맞물려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의식에 대한 공부 즉 지혜의 개발은 그래서 필요하다.







이처럼 우주의 근원적인 질서인 타오를 우리 인간이 알아갔을 때 지혜와 통찰력은 저절로 깊어지며,



그에 따라 삶은 더욱 넓은 우주로 열려가며 행동 속에 싱싱한 의미를 되찾게 된다.







사랑과 자비는 그런 여유로움 속에서 우러나올 수 있다.



이치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가 성장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이치를 삶에 적용시켜서 우리 삶에 행복이 증대하고 지혜가 자라나가며



더욱 창조적이고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여서 인간관계나 일에 대해 성취가 커지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이처럼 지성과 지혜를 개화시킬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이를 적용시켜 삶의 풍요를 누리는 법이 해피타오(happytao)이다.



이것은 정신의 과학인 동시에 삶의 예술이다.









타오는 안팎을 연결하는 전체생명의 장이며, 그 생명을 이끄는 미묘한 질서요, 조화이다.



행복과 타오 즉 합일된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다음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1. 정성을 다하라 :



자기 자신을 만나든, 사람을 만나든 또는 어떤 일을 만나든 그 일에 다가가는 자신의 정신적 울림이 제일 중요하다.



모든 만남은 그 울림이 얼마나 고차적이고 전적인지에 따라 달렸다.



그러한 전적인 태도를 우리 선조들은 단지 정성이라고 불렀다.



도에 이르는 길은 단지 정성일 따름이다. 한울림 명상, 중심잡기로 조율한다.







2. 조화롭게 예절을 구사하라 :



섬김과 모심으로 대상목적에 임한다. 알맞은 정도를 살핀다.







3. 있는 그대로 보라 :



바로 봄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직시한다.



직시하면 바른 이해가 열리고 바른 이해에서 사랑과 온전한 행동이 나올 수 있다. 직시하기, 마음여행, 소울 태스크







4. 본성을 기억하라 :



자신의 본성에 이르는 통로를 여는 구체적인 수련 방법들. - 빛들이, 삼밀, 시공너머로, 만물속에서, 리탐바라







5. 행동화를 배우라 :



뜻을 실현하는 방법을 배운다. 뜻을 어디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지 알게 된다.



뜻세우기, 목표세우기, 행동하기







6. 생활을 중시하라 : 삶속에서 배운 것을 익혀간다.

空- 텅빈 피리되어

텅빈 피리되어.....










모든 카르마는 내 마음이 바깥대상을 만났을 때 찍힌 인상이다.



이것은 허상이며 진정한 원인은 나의 생각과 관점이다.



그러므로 그 원인을 돌이켜 본성의 밝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행복의 첫 관문이다.









생각이 본성의 빛으로 들어갔을 때, 밝고 바른 생각이며 밝은 삶을 짓고



마음과 생각이 본성의 빛을 여의고 바깥대상을 본 것을 착각이라 하느니라.



이 착각 즉, 주관적 현실을 통해 행위를 일으킬 때



이원적 카르마가 주위에 감겨 끈끈한 어둠과 미혹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미혹된 마음에 이끌려 판단을 일으키기에 앞서



본성으로 돌이켜서 밝은 눈으로 바깥을 비추어보는 것이 지혜이다.



이것이 객관적 현실이며 조화와 무위의 행동은 여기서 비롯된다.









본성의 빛을 깨우고 그 장 속에 그대의 고유한 생명을 꽃피워라.



삶의 깊은 체험과 100%의 행동을 통해 본성을 실현시키며



삶의 과정에서 중간 중간 솟아나는 부조화와 불화는 묻혀있던 카르마



즉 주관의 나타남이니 밝음으로 돌이켜 큰 길로 나가라.



이는 다만 에너지장이 되어 있던 카르마가 풀려가는 과정이라



묵묵히 불안을 통고하면 더욱 진실한 빛과 만나게 될 것이다.









밝음은 간직하고 어둠은 통과시켜라.



진실엔 감응하고 거짓은 통과시켜



모든 것을 수용하는 텅빈 피리 되어라.